2019년 3월 27일 수요일

컴퓨터 청소하기

내가 소유한 물건에 대하여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되는 가장 좋은 계기는 이사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이사를 하면서 소중하게 챙겨왔던 물건을 한번도 꺼내지 않다가 새로 이사를 준비하면서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겪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말 필요한지 아닌지가 확신이 되지 않는 물건이라면 일단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여라. 6개월이 흐른 뒤 그동안 단 한번도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있었다면 버려도 좋다는 것이다. 내가 한마디 첨언한다면 6개월이 지나는 날, 버릴 결심을 하는 순간 그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열어볼 필요조차 없다.

왜 하필이면 6개월일까? 계절이 바뀌면서 넣어 둔 옷은 다시 그 계절이 돌아올 때가 되어야 꺼내 입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주기는 대략 6개월로 볼 수 있으니, 이는 매우 합리적인 기준이 된다. 패션에 아주 민감한 부자가 아닌 이상 계절이 바뀌면 예전에 넣어둔 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하지 않는가.

파견발령을 받아 4월 1일부터 근무지를 바꾸게 되면서 내가 쓰던 물건을 정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소위 '드라이 랩' 위주로 연구실을 운영하다 보니 내가 관리하는 대부분의 장비는 컴퓨터이다. 일부는 반출 신청을 하고, 나머지는 이전 근무지에서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정비를 하였다. 고장난 RAID array는 새로 구성하고, 먼지를 털고, 성능이 너무 떨어지는 서버는 아예 전원을 내리고...

작년에 건물 지하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발생한 그을음이 서버를 보관하는 3층 골방까지 타고 올라와서 서버를 엉망으로 만들었었다. 청소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방치하였다가 최소 2년 동안은 내가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칼을 빼들기로 하였다. 아래 사진에 보인 서버는 2009년 10월에 내가 최초로 구입한 랙마운트 조립서버이다. Tyan의 S7002 보드에 인텔 E5620(2.4GHz)가 두 개 꽂혀있다. 메모리는 보드에서 지원하는 최대 용량인 64GB를 장착하였다. 서버의 별칭은 proton. 21C 프론티어 양성자공학기술개발사업단의 과제 지원으로 구입하였으므로 양성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서버를 구입하기 전에는 사무용 컴퓨터 수준의 것에 리눅스를 깔아서 사용했었다. 만 10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 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추가한 것 외에는 단 한번도 장애가 발생하지 않았고 간혹 공지된 정전기간 이외에는 전원을 내리지도 않았다. 2015년에 현재 쓰는 서버(벌써 4년이 흘렀다)를 구입하면서부터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꽉 채워서 RAID array를 구성하여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사용하였다. 참 대견한 녀석이다.


카트에 싣고 살살 건물 밖 마당으로 나가서 뚜껑을 열고 압축공기 캔으로 열심히 그을음을 떨어내었다. 컴퓨터에 내부에 보통 끼는 먼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공기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걸레질을 해 가면서 열심히 닦았다. 또 다른 랙마운트 서버인 microbe는 USB 3.0 인터페이스 카드를 꽂아서 Oxfor Nanopore Technologies의 MinION을 구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가장 성능이 좋은 Dell 서버는 전산센터동의 서버실에 있어서 특별히 유지 관리를 할 필요가 없다. 사실 이것도 내년이면 구입 10년차가 된다. 전산장비를 쓰면서 그렇게 큰 장애를 겪은 일이 없다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수백 대의 서버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늘 긴장 상태이겠지만 나는 소규모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관리하는 컴퓨터의 수는 열손가락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이니까.

고만고만한 수준의 서버 4대를 모아서 오라클 그리드 엔진으로 묶었었는데 실제로 이를 많이 쓰지는 못했다. 하드웨어가 제각각인지라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계산 노드가 항상 전체 실행 시간을 잡아먹고 있어서 점점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드 엔진을 해체하면서 부팅을 할 때마다 마스터 및 계산 노드 각각이 실행하는 설정 스크립트를 어느 단계에서 돌리는지 찾아보았다. /etc/profile 파일의 맨 끝에 붙어 있기에(다음의 라인) 이를 코멘트 처리하였다. 내가 직접 오라클 그리드 엔진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KOBIC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서 상세히 기억을 하지는 못한다.

source /data/gridengine/default/common/settings.sh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곁의 KOBIC에서 늘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이제 새 파견지로 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력갱생을 해야지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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