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7일 화요일

독서 기록 -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Digital vs. Human)

어제는 서울에 위치한 어느 병원에 일 년에 한 번 들르는 날이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접수를 마친 다음 대기실에 마련된 커피 믹스를 타 먹으려고 냉온수기를 작동시켰다. 사무실이나 공공 시설에서 흔히 보이는, 즉 커다란 물탱크가 뒤집혀서 꽂혀있고 냉수와 온수 배출구가 따로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병원의 현대적인 분위기에 잘 맞도록 별도의 물탱크가 없이 만들어진 아담한 크기의 예쁘장한 장치였다. 날씨는 이미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고, 냉온수가 바로 곁에 따뜻한 물을 부어서 먹는 커피믹스와 녹차 종류가 마련되어 있어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버튼을 눌렀다. 버튼 위에는 ‘한 번만 눌러주세요’하는 친절한 문구를 별도로 붙여 놓기까지 하였다. 원터치식이므로 물을 뽑기 위해 계속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이 한 번만 누르라는 뜻이였다.

‘그래, 알았다. 내 한 번만 누르지...’

종이컵에는 정확히 한 컵 분량의 물이 담겼다. 그러나 커피믹스 가루는 전혀 물에 녹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찬물이 나온 것이다. 물이 배출되는 관은 하나였고 터치식으로 냉온수를 선택하는 장치였다. 당연히 기본 작동은 찬물 쪽이었다. 화상을 막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일 것이다. 그러나 ‘한 번만 눌러주세요’라는 안내문구와는 별도로 ‘더운물을 이용하시려면 꼭 왼쪽 버튼을 터치해 주세요’라는 안내문구까지 있었더라면! 가정용 냉온수기라면 손색이 없는 장치였다. 큰 설치면적을 차지하지 않을뿐더러 소수의 사람들이 제한된 곳에서 사용하므로 한두번 실수를 경험한 뒤에는 또다시 찬물을 커피믹스에 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커피를 버릴 수도 없는 형편이라 최대한 젓개로 잘 휘저어서 두어 모금에 삼켜야 했다.

무엇이든 알아서 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에 중독되어 순간의 판단 착오를 하고 만 것이다. 만약 이보다 저렴한 냉온수기였다면 찬물과 뜨거운물이 나오는 출구가 따로 있는 매우 직관적인 구조였을 것이고, 나와 같은 실수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끔 겪는 다른 일이 떠올랐다. 종종 연구과제나 용역 등을 심사하기 위한 자리에 불려가고는 한다. 두꺼운 평가용 자료를 참조하면서 발표를 듣고, 평가서에 점수를 매기는 일이다. 평가 항목 중에는 객관적으로 수치화가 가능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기업의 신용 등급, 논문 출판 실적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심사위원이 직접 계산을 하지는 않는다. 추최하는 곳에서는 친절하게도 미리 계산을 하여 심사위원에게 주어지는 평가서에 이미 이러한 수치를 적어 놓는다. 심사위원은 다른 까다로운(?) 항목에 대해서만 점수를 매기고 합산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단순한 계산 작업에는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도록 미리 준비를 해 주는 것이다.

후자의 사례에서는 수치화된 항목의 점수를 미리 매겨 놓는 데에 인공지능이 개입하지는 않는다. 다만 평가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주최측에서 시간 절약과 편의를 위해 미리 작업을 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심사위원들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을까? 물론 이 항목들은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으므로 평가 당일 심사위원들이 하든 사전에 주최즉에서 하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단순한(실제로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나는 그것을 최종 승인만 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내가 위계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 줄을 지어 결재판을 들고 오는 직원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고급 만년필로 멋지게 결재 사인을 하는 부류의 사람 – 그런 심오한 역할 착각 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절약한 시간만큼 나는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둘 다 생각일 뿐이다. 더욱 지위가 높고 가치 있는 일을 다룰 수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들기만 할 뿐, 실제 그런 책임이 주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냉온수기의 버튼을 누름으로써 나는 내 만족감을 스스로 박탈당하고 말았다. 최소한 찬 물에 녹지도 않은 커피를 버리지는 않았으니 자원을 낭비하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수는 있겠으나 투입된 자원 대비 효용을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일을 하다가 이렇게 낭패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직접 생각을 하고 판단하는 일을 누가 대신 해 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기차 안에서 읽은 책은 지나친 디지털화가 가져다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미래 사회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쓰인 것이다. 국내에 번역되면서 [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원제는 [Digital vs. Human]이다. 물리적 세상과 디지털 영역 사이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일어나는 인간성 상실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속도, 효율, 편의를 좆는 디지털 혁신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국의 미래학자인 리처드 왓슨이고 방진이가 옮겼다.



이 책은 부끄럽게도 실직 상태의 부부가 PC방에서 온라인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임에 몰두하면서 정작 자기들의 아기는 집에서 굶긴 상태로 방치한 뉴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건이 극히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일탈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디지털 세상이 오면서 그동안 당연시되던 가치가 뒤틀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심각한 사례인 것이다.


  • 수고를 들여 공부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짧게 쓰인 정보의 단편만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하지 않으면서 휴대폰 속의 작은 화면을 통해서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이부자리 속에 누워서도 이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 장엄한 광경을 몰입하여 감상하지 못하고 그저 휴대폰 카메라만을 들이댄다. 진지해야 할 자리(예: 자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의 'Arbeit Macht Frei'라고 쓰인 현판 아래 등)에서 남에게 보이기기 위한 셀피를 찍는다.
  • 읽지도 않은, 혹은 결고 읽지도 않을 정보를 공유(리트윗)한다.
  • 대면 접촉을 회피하게 된다.
  • 정보의 투명한 공개를 지향하는 것처럼 말하는 유명 SNS의 억만장자 회장은 정작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집 주변의 부동산 수천만 달러어치를 사들인다.
  • 집단 지성을 추구하면서 개인 차원에서 해야 할 연대 및 참여 등을 등한시한다.
  • 필요한 일과 가능한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
  • 디지털 세상에서도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
  • 익명성 뒤에 숨어서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해서 사회적 책임이 옅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해도 집에 돌아오면 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세상에서는 24 시간 괴롭힘을 당한다. 상대를 대면하고 있지 않으면 그에게 입히는 피해에 대해서 무감각해진다. 이는 무인기를 원격조종하여 폭격을 실시한 군인(기술자?)들에게서 흔히 보고되도 있다.


기술이 필요성을 채워주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것 같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서 경제가 돌아가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부가 축적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말이다. '컴퓨터가 있으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은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질병에 시달리고 미신과 무지·정치적 억압에 짓눌리며 전쟁과 빈곤에 의해 평균 40살도 되기 전에 생명을 다하던 중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 기술 발전은 피할 수 없다.”

생활이 윤택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세상은 분명 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다가는 인류 전체가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음을 항상 고민해야 한다. 수고를 들여서 생각을 하고, 자동 프로세스에 판단을 맡기지 않고, 약간의 편의를 위해서 프라이버시를 제공하는 일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커다란 정치적 음모를 뒤에 숨기고 있는 빅 브라더는 현실적으로는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발전과 편의제공이라는 좋은 명분 뒤에 도사리고 있는 기업들의 수익 창출 전략에 대해서 바로 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존엄성 중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