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한국연구재단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10조 제1항 및 같은 법 시행령 제6조 제1항에 따라 2010년 이후 국책연구사업 바이오 분야 기획위원 정보의 공개를 청구 받았습니다. 명단 공개를 위해, 해당 기획위원께 개인정보 제3자 제공에 대한 동의를 받고자 하오니, 아래의 동의 문항에 응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 생략] 한국연구재단에서는 매년 정부 R&D 약 20조원에서 5조 가량의 막대한 예산을 연구과제 지원에 집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의 과제 기획 및 선정 과정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제 기획 및 선정 위원들의 공개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에 해당 정보가 공개되고 있습니다만 기획위원, 선정 평가 위원 및 선정 과제 책임자 정보가 통합되어 공개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통합된 자료가 공개된다면 한국연구재단의 과제 선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최근 8년간 바이오분야 국책과제 기획 및 심사위원 명단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받아 해당 과제의 기획 및 심사위원 선정이 공정하게 진행되었는지 파악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해당 관련 기관에 개선 방안을 건의하는데 이용하고자 합니다.메일을 받고보니 기분이 조금 나빠지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어느 대학 교수님(위 인용문에서 '본인'으로 표현)께서 과제 선정 과정이 공정하지 못한 것 같으니 기획 위원의 이름과 당시 소속기관을 공개하라고 청구를 한 것이다. 조사를 해 달라고 청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관여한 기획위원의 명단을 제공하면 본인께서 문제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판정하겠다는 뜻이다. BRIC의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조금만 검색을 하면 누가 이런 정보를 청구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정부 수탁 과제는 우선 '기획'이라는 과정에서 시작을 한다. 계획과 기획은 다르다. 계획은 하기로 결정된 일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인지 밑그림과 실행방안을 그려나가는 것이고, '기획'은 아직 하기로 결정되지 않은 일을 하고자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타당성을 제시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작업은 기획의 몫이다. 즉 기획이 잘 되었어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일은 엄청나게 많다. 어떤 분야의 연구가 필요한지 사전 제안서를 받고, 정부 부처에서는 이를 근거로 심의와 조정을 거쳐서 사업을 확정한다. 그러면 과제제안요구서(Request for proposal, RFP)와 함께 과제 공고를 낸다. 이를 보고 여러 응모자가 과제 신청서를 제출하여 심사를 통과하면 연구비가 나오고, 연구를 진행하고, 평가를 받는다. 과제의 선정과 진도관리 평가 등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업의 경우 연구재단이 맡는다.
여기에서는 공정성을 위해 '심판과 선수 분리 법칙'이 적용된다. 즉 과제에 응모하고 싶은 사람은 기획단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안서는 개인이 수시로 제출할 수도 있지만 큰 규모의 일은 탑-다운 방식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과제를 따고 싶은 사람은 일이 성사되게 하려고 여러 가지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합법적인 로비인가, 혹은 부정한 행위인가? 참 어려운 문제다. 공정성 시비가 벌어지는 것도 바로 과제를 따고 싶은 사람이 이러한 진행 방식에 영향력을 미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기는 사람은 과제를 수주하는 과제책임자이다. 주변 연구자, 학계, 기업(기업이 참여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야 선정이 잘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공무원 등과의 친분을 쌓아서 일이 잘 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절대 사전 제안서 제출 단계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결국 어떤 분야의 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이 제안서를 내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최소한 제도적으로는 이를 막아 놓았다. 그러니 편법 비슷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때로는 학회에다가 기획을 맡겨서 특정 사업에 긍정적인(쉽게 말해서 이 사업이 중요하니 꼭 해야만 하고 얼마의 예산이 앞으로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내기를 주문하기도 한다. 보고서는 당연히 호의적인 결론으로 간다.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충분한 기획 비용을 대고 기획 보고서를 만들도록 요청하는 것이 가장 공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서 이해 관계가 없다면 전문성 또한 부족할 수도 있다. '학자로서 이 분야를 연구하므로 내가 잘 안다'라는 것이 그 분야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것일 수 있는가? 그 분야의 과제를 수주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 당연히 그 분야를 잘 알 수밖에 없고(그러니 기획을 가장 잘 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과제를 딸 수 있다면 이익을 보는 것이다.
내가 무슨 사업의 기획위원이었더라? 책장에 꽂힌 2010년 9월 발간 교육과학기술부(부처 이름은 참으로 자주 바뀐다) "국가유전체연구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미생물유전체 파트를 내가 작성했고, 보고서 저자 중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작성은 하고 작성자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이것이 요즘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다부처유전체사업'을 시작하게 만든 근거 자료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연구재단에 기획위원의 정보 공개를 요청했던 그 교수님도 이 과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이 과제를 수주하지도 않았고, 어떤 혜택도 받은 바가 없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어느 사업단에서 발주한 기획(아마 학회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었을 것이다)에도 참여한 바 있지만 나는 과제를 수주하지 않았..(아니 못했)다. 우리 연구소가 그 사업을 많이 수주하였으니, 과제 기획 당시 같은 기관에 있었던 네놈도 그 기획보고서를 너희 기관에 유리하게 작성하였을 것 아니냐? 뭐 이런 잣대를 들어댈 것인가? 맘대로 생각하라고 해라.
기획보고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업이 만들어질 때 부처 안에서 돌아다니고 공포되는 서류이다. 사업의 필요성, 국내외 관련 분야 현황, 예산 규모, 실행 계획, 활용 방안, 진짜 공고가 나갈 RFP.. 만약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려면, 이 문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어이쿠, 기분이 상해서 이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이제는 문자메시지로 동의 여부를 알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참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하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맘대로 하세요! 정보 공개에 동의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