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친구란 생각보다 성립하기 어려운 관계다. 나이가 같거나 비슷해야 하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평가하거나 지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아야 한다. 위계 질서가 흔들린다고 느끼면,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런 말을 내뱉으며 관계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곤 한다.
"내가 네 친구냐?"
이 한마디는 단순한 꾸중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인간적인 관계를 거두고 다시 위아래를 확인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적어도 나에게 친구란,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일종의 금기어가 되었지만, '동무'라는 말이 본래 지녔던 의미가 새삼 그리워진다.
내가 일하는 분야의 공무원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출연연 소속으로서 그 공무원의 직접적인 관리 및 통제 권한 '아래'에 있을 때라면. 아무리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아도, 결국 그는 정책을 집행하고 평가하는 위치에 있고 나는 그 정책의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다. 언젠가는 전화 통화 한마디, 보고서 한 장, 발표자료 한 페이지를 두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에둘러 표현하였지만, 그 관계의 본질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예산 집행 권한에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수행하는 두 사람이 된다. 한 사람은 정책을 집행하고 평가하며,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관계에서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직접적인 이해 관계가 없이 나의 분야와 전혀 동떨어진 일을 담당하는 공무원과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를 평가하고, 예산과 사업, 조직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과는 아무리 가까워 보여도 끝내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전화 통화나 회의 내용을 녹음하고, 요즘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서비스를 이용해 이를 글로 옮긴 뒤, 우리는 그 기록을 마치 종교 경전이라도 대하듯 반복해서 읽는다. 어떤 책망이 담겨 있었는지 ― 이건 정말 반복해서 읽고 싶지 않다 ― 어떤 지시가 있었는지, 어떤 표현에 방점이 찍혀 있었는지, 그리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행간에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해석한다. 혹시라도 놓친 뜻이 있어 상급자의 기대와 다른 결과물을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발표자료와 보고서를 다시 고친다. 함께 목표를 논의하는 동료라기보다, 상대의 의중을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린 순간, 적어도 나에게 공무원은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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