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서적을 파는 알라딘 매장에 가면 출간된 지 1-2년 이내의 책을 모은 서가가 있다. 신간에 가까운 책을 사기 위해 이곳을 둘러보다가 유난히 같은 종류의 책이 많이 꽂힌 것을 발견한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중고 시장에 나왔을까? 혹시 무리하게 시장에 너무 많은 양이 풀렸다가 중고 책방에 다시 모인 것은 아닐까? 별로 소장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되도록 빨리 읽은 다음 깨끗한 상태일 때 되팔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서 기성 정치인 또는 정치에 입문하려는 사람이 선거일을 앞두고 출판 기념회 및 후원회 성격의 행사를 갖는 일이 많다. 이런 자리에서 팔렸거나 혹은 뿌려진 책이 계속 소장할 만한 책으로 여겨져서 누군가의 책장에 계속 꽂혀 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는 책을 사면 구입한 날짜와 이름을 꼭 쓰는 편이다. 중요한 곳에 줄을 치기도 한다. 그런데 중고서점에서 깨끗한 책을 보게 되면, 나중에 되팔게 될 것을 감안하여 되도록 깨끗하게 보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찌 되었든 중고서점에 같은 책이 여러 권 꽂혀있는 것을 보면 저 책들은 깊이 있게 읽을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 회장까지 한 사람이라면, 그가 몸담았던 조직 안에서 기꺼이 그 책을 읽으려는 움직임도 있겠지만 선택의 여지 없이 그 책을 사야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다. 저자 소개를 보면, 이 책('초격차')을 쓴 사람이 삼성전자를 이끌면서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에 오른 것은 2017년이었고, 이 책이 발간된 것은 그가 회장직을 물러난 다음인 2018년이었기 때문이다. 즉 현직에 있으면서 영향을 크게 미칠 시기를 비켜나서 책을 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10일에 초판 1쇄를 찍었는데 불과 보름 만에 36쇄를 찍은 것을 보면 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 보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한 의구심을 갖고서 지난 토요일 책 두 권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 넘볼 수 없는 차이를 만드는 격《초격차》| 전 삼성전자 회장 권오현 지음
- 경제로 보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경제e》| EBS 지식채널e 지음
현상 유지 정도로는 불충분하고,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가지 않으면 기업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다는 최소한 기업 활동에서는 참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초격차'라는 제목만 놓고 보면 이를 이루기 위해서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을 하라는 건지 벌써 가슴이 답답해지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실제로 그런 압박감을 주지는 않는다. 리더, 조직, 전략, 그리고 인재의 네 단원으로 구성된 이 책은
소위 워라밸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면서 개인의 생활도 이렇게 밀어붙여야만 한다는 빡빡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초격차'라는 제목만 놓고 보면 '월화수목금금금' 생활을 하라는 건지 벌써 가슴이 답답해지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압박적인 느낌을 주는 책은 아니다. 리더, 조직, 전략, 그리고 인재의 네 단원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경험에서 체득한 경영의 원리를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문제로 써 내려가고 있다. 일반 사원(연구원)으로 입사하여 약 30년을 거치면서 국내 정상급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그 조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는 얼마나 비밀스런 요령이나 책략이 숨어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결정과 지시는 일방적인 상식에 근거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290쪽).
형식적으로는 네 개의 주제로 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에 관한 것이었다(최소한 나에게는 그렇게 읽혔다). 나머지 세 주제, 즉 조직을 구성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인재를 잘 키우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결국 리더의 일이기 때문이다. 유능한 리더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즉, 그가 물러났을 경우 조직의 역량이 와해된다면 안된다는 뜻이다.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후배를 양성하는 것(그에게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도 리더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리더는 어떠한가? 자기가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조직이 잘 굴러가지 않게 자기에 대한 의존성을 재임 기간 중 더 많이 구축하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었던가? 마치 재선을 지상목표로 여기는 정치인들처럼.
저자가 생각하는 인재('인력'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의 유형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아래로 갈수록 조직에 위험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3-4 유형은 인재라고 할 수도 없겠다.
-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사람
- 개선 의지가 있고, 반응하는 사람
-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사람
- 방어적이고 방해하는 사람
만약 조직이 생존의 위기에 놓인 상태라면 3이나 4 유형의 인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269쪽에서는 이 책의 전체에 걸쳐서 가장 심각하고도 단호한, 어찌 보면 잔인한 내용이 나온다. 그 사람을 재교육(repair)할 것인지, 제거(remove)할 것인지, 아니면 교체(replace)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도 사람을 부품으로 간주하는 것 같아서 이런 이론을 공공연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초격차》라는 제목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치 '무엇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었나?'의 해답을 주기 위해 쓴 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노조 경영, 관리의 삼성, 미래전략실... 삼성의 성공을 이끈 요인으로서 만약 이런 부정적 이미지가 자꾸 떠오른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지만 삼성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조직의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전략과 추진 방법에 관한 지침서로서, 삼성이라는 편견을 거두고 읽는다면 매우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겠다.
그리고 삼성이 반도체로 세상을 평정하게 된 그 시발점에는 강기동 박사라는 분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라디오 땜질하는 이분, 한국 반도체의 뿌리입니다 (여기에서 라디오란 방송용 라디오 수신기가 아니라 통신용 무전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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