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4일 화요일

기록과 물건을 남기지 않기

별로 쓸모도 없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을 버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이사'다. 짐을 싸려면 내가 소유한 모든 물건을 전부 꺼내야 하고, 이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된다. 쓸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짐을 꾸리고, 이 물건들은 새로운 장소에 가서 다시 펼쳐져서 계속 쓰이게 된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물건들은 그대로 수납공간에 들어가서 다음번 이사를 갈 때까지 햇볕도 한번 쐬지 못한 상태로 잊혀지게 된다. 이런 물건은 첫 이사를 하면서 짐을 꾸릴 때 과감히 버렸어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퇴사 통고를 받은 직장인이 종이상자 하나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서는 장면을 흔히 보게 된다. 그만큼 업무 공간에 개인 짐을 많이 부려놓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나도 사무실을 비교적 자주 옮기는 편이라 짐을 조금씩 줄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작년 4월, 파견근무지로 오면서 업무에 꼭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던 책과 논문 인쇄본을 약간 들고 왔다. 논문 인쇄본은 일년이 넘도록 수납장 속에서 잠들어 있고, 가져온 책 중에서 가끔이라도 펼쳐보는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짐을 좀 더 줄여서 가져오는 것이 나을 뻔하였다.

아이들도 장성하여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져서 원래 올해쯤에 집을 수리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이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잡동사니들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하여 경제를 비롯한 모든 활동이 위축되면서 집 수리 계획은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다. 집은 좁고, 책이나 취미 등을 위해 사들인 물건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이는 현실을 타개할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다.

우리집에는 그렇게 책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리를 논하는 것이 좀 우습다. 거실에서 남쪽을 향해 자리잡은 책장에 꽃인 책들은 점점 변색이 되는 중이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100권 이내로 줄이고, 새로운 책을 들이는 만큼 흥미가 떨어진 책을 처분하는 방식을 택할 것인가? 이런 방식을 택할만큼 집이 책으로 넘쳐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정말 없애고 싶은 책은, 제출하고 남은 학위 논문과 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원고이다. 학문이 뭔지도 잘 모르는 철없던 시절에 어설프게 쓴 것이라서 갖고 있기가 너무 부끄럽다. 이제는 새 직장에 지원하기 위해 학위논문 책자를 제출할 일도 없고, 이를 소장함으로 인해서 세상의 지식에 더 기여하는 바도 없다. 후대에 기억될만한 과학자가 되어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디지털화한 '기록'을 계속 갖고 있는 것이 정말 필요한가? 내가 기억하지 못한 순간에 동의 버튼을 클릭하면서 저절로 생성된 갖가지 기록이 거대 IT 서비스 업체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디지털화된 기록은 당장 나에게는 공간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기록 남기기에 너무 몰두하면서 정작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 사진 기록을 통해 추억을 더욱 선명하게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순기능이나, 정작 현장에 있었던 과거 그 순간에는 휴대폰을 매만지느라 당시를 즐기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떠한 형태의 기록물이든(즉, '데이터') 일단 버리지 말고 저장해 두면 컴퓨터가 이를 해석하여 으미 있는 결론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물건이나 기록들을 결국 폐기한다는 것은 결코 미덕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무엇이 정말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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