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화가 이정규의 작품 전시회 -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의 전시회였으니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 싸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
- 테네시 윌리엄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화가 이정규는 외가쪽으로 육촌 누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뵌 지도 꽤 오래되었다.)
[무덤 없는 주검]은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소재로 한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가열찬 투쟁을 이어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고문 앞에서 조직을 살리기 위해 비밀을 지킬 것인가 혹은 자신이 살기 위해 비밀을 발설할 것인가의 놓고 벌이는 처절한 갈등을 그렸다. 후자의 선택을 비열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평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태도겠지만 그러한 위협이 실제로 자신의 목을 졸라 올 때, 당연히 정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침략자에게 부역을 한 사람을 전부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인류와 더불어 역사를 같이 해 온 전쟁을 관객과 같이 하는 즐거운 비언어 퍼포먼스로 바꾸어 놓은 거리극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극단 필통의 물싸움 파트-1 '너무 오래된 전쟁'이었다. 때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5월 하순, 아내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생각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져서 사람이 적은 곳 위주로 돌면서 예상보다는 빨리 관람을 마치기로 했다. 서화관 불교회화실에 전시된 압도적 규모의 공주 마곡사 탱화(링크) 앞에서 기력을 좀 되찾고 나오는 길에 오다가 박물관 열린마당에서 열린 공연 행사를 보게 된 것이다(링크).
극단 필통의 비언어 퍼포먼스 [물싸움1-아주 오래된 전쟁]. |
몹시 더운 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빗자루질을 하던 출연자 1은 너무나 목이 마르다. 무대 여기저기 흩어진 물병과 컵을 허겁지겁 찾아서 기울여 보지만 전부 빈 상태. 물병으로 가득 찬 궤짝은 자물쇠로 견고히 채워져 열리지 않는다. 곧이어 나타난 출연자들은 물이 가득한 궤짝을 너무나 쉽게 열고 자기들만의 물잔치를 벌이지만 정작 물 한잔만 달라고 애원하는 출연자 1에게는 불리한 게임을 제안하며 인색하게 군다. 급기야 이들 사이에는 물 전쟁이 벌어진다. 물 한잔은 출연자 1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무기가 되었다. 권총 수준의 물총에서 기관포, 탱크, 급기야 비행기까지 나타나서 서로에게 막대한 양의 물을 퍼부어댄다.
관객들에게도 물풍선과 물양동이가 주어지면서 직접 참여를 유도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대로 각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 연극을 해석할 수 있다. 더운 여름날 오후에 출연자와 관객이 모두 무대와 객석이라는 경계 없이 즐길 수 있는 시원한 거리극으로만 받아들여도 되고, 자원과 자본을 독점한 권력자와 그 앞에서 투쟁하는 힘 없는 개인이나 노동자로 해석해도 좋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파멸하고 만다.
약 30분에 걸친 공연을 보면서 아이들을 즐거워했지만 나는 왠지 슬퍼졌다. 아마 이를 기획한 사람도 이러한 의도를 갖고서 만든 작품이 아니었을까 한다. 앞쪽 줄에 앉아서 관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내 옷은 젖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뒤 터진 풍선과 물감을 들인 물 얼룩을 청소하려면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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