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1일 목요일

Spoligotyping과 CRISPR

세균의 subtyping이란 종(species) 혹은 아종(supspecies)보다 더 낮은 단계까지 구별하는 행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strain 수준에서 미생물을 동정하는 행위(=strain identific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역학(疫學·epidemiology: 지역이나 집단 내에서 질환이나 건강에 관한 사항의 원인이나 변동하는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 전염병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음. 물리학의 한 분야인 力學이 아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감염원의 동정 및 outbreak의 발생 여부를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벽한 subtyping은 whole-genome sequencing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따라서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한 PCR 기반의 서브타이핑 방법이 여전히 널리 쓰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Mutilocus variable number tandem-repeat (VNTR) analysis
  • Multilocus sequence typing (MLST)
  • (기타 non-PCR 기법) RFLP, PFGE 등
Spoligotyping은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 complex, MTBC)의 typing에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결핵균의 염색체에는 36 bp의 direct repeat(DR)이 34-41 bp의 spacer를 사이에 두고 연속적으로 배열한 구조가 존재한다. DR 영역의 끝부분에 바깥쪽을 향하게 결합하는 primer를 사용하여 spacer 영역을 전부 PCR로 증폭한 뒤, 표준 결핵균주에 해당하는 H37Rv(NC_000962.3) 및 Mycobacterium bovis BCG에서 알려진 43종의 spacer에 해당하는 oligomer array에 hybridize하여 어떤 타입인지를 알아내는 방법이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914561/
미국 CDC에서 배포한 자료인 'Spoligotyping and Mycrobacterium tuberculosis(PDF 링크)'에 좀더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Spoligotyping에 쓰이는 염색체 부위는 어쩌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전자 편집 기술로서 각광을 받는 CRISPR/Cas 시스템의 CRISPR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 그림에서는 편의상 생략하였지만, 결핵균 유전체의 DR 영역에 IS6110이 삽입되어 있어 PCR로 이를 철저히 분석하는 것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임상분리균주에 따라서 IS6110의 삽입 위치는 약간씩 다르다. 또한 CRISPR과 그 주변 영역에 결실이 일어난 균주는 negative spoligotype을 나타내기도 한다('Structure and variation of CRISPR and CRISPR-flanking regions in deleted-direct repeat region Mycobacterium tuberculosis complex strains'. BMC Genomics 2017 18:168 PMC 링크). CRISPR 영역 자체가 이렇게 변할 수도 있고, 어차피 모든 원핵생물에 이 시스템이 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유전체 정보가 확보된 고세균의 85%, 박테리아의 48% 정도에만 CRISPR-Cas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미생물의 subtyping 용도로 가장 이상적인 CRISPR은 무엇일까? 만약 bacteriophage나 plasmid가 많은 조건이라면 spacer 서열을 획득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outbreak가 일어나는 시간 프레임 안에 CRISPR이 변하게 되므로 subtyping의 유용성이 줄어든다. 혹은 내부 spacer가 없어지거나, SNP가 발생하거나, 하는 등의 사고를 겪을 수도 있음을 염두어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 쓴 글은 다음의 리뷰 논문을 많이 참고하였다.

CRISPRs: Molecular signatures used for pathogen subtyping. Appl. Environ. Microbiol. 2014 80:430 (PMC 링크)

또한 결핵균의 genotyping marker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로는 SITVITWEB이 유명하다고 한다.

바쁜 5월을 마무리하며

논문 작성과 워크숍 발표 준비로 바쁜 5월을 보냈다. (주)엠디엑스케이에서 개최한 PacBio User Group Meeting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지난 2013년부터 경험한 PacBio RS II 기반 유전체 해독 사례를 총정리하고, 최근에 공개된 software tool을 적용하여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발표할 주제에 대한 배경 설명을 매우 중요시하는 나에게는 보통 주어지는 30분의 발표 시간이 늘 부족하다.


외부에서 부탁을 받는 강연은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쁜 일정을 쪼개어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다.

  • 기한만 채우면 되는(혹은 쪽수만 채우면 되는) 보고서
  • 참석자 수만 채우면 되는 회의(또는 행사)
  • 결론을 내리지 않고 끝나는 회의
  •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하는 회의
  • 순서에 따라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고 정해진 시간에 끝나는 패널 토론
  • 행사의 무게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행사 시작 부분에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행위
  • 행사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고 행사장 주변에서 와글거리는 사람들
모두 본질은 외면하고 형식과 보여주기에 치중하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연구도 그런 것 같다. 이번 PacBio UGM에서는 문화와 관련하여 평소에 슬라이드로만 비추었던 나의 주장을 인쇄물로 남기기에 이르렀다. 핵심 슬라이드 두 매를 블로그에도 소개하고자 한다. 혹시 인터넷에서 아래의 같은 글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내 슬라이드를 누군가 도용한 것이다. 행사를 주관한 회사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비난에서 나 역시 벗어날 수는 없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것들이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개인으로서의 책임, 가정에서 해결해야 할 일, 지역사회나 국가가 제공해야 할 일 등이 돈을 내고 사는 서비스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제 연구라고 하는 영역도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대가 되었다. 논문을 보고, 동료와 토론을 하고, 잘 안되는 것은 다시 실험을 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과정이 이제는 돈을 주고 소비자의 입장으로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상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갑'의 입장이 되어 연구 결과의 생산 과정을 콘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구매자(=연구자)에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외형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포장된 결과를 가지고 나의 업적으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과연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당하게 수행되었는지, 또한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효율적으로 수행되었는지를 잘 따지지 않게 된다. 

연구 수행의 일부분, 즉 고도화된 장비를 표준 프로세스로 돌려서 일정 품질의 데이터를 얻어내는 규격화된 작업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은 일견 바람직하기도 하고 그 추세를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종 작업은 자신의 손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 과제책임자는 또 누군가를 시켜서 일을 하겠지.

오케스트라를 꾸미는데 악기를 연주하는 단원은 없고 전부 지휘자가 되고 싶은 꼴이라고나 할까. 월간중앙에 실렸던 이국종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해 본다(링크).

직급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의사는 고단한 수술실에 잘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인정받는 자리에서 존경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아래 의사들이 대리수술을 한다. 우리나라 어느 병원은 의사 한 명이 암 수술을 연간 1000건 넘게 한다고 홍보한다. 그게 자랑할 일인가? 그건 정상이 아니다... 최고 지휘관들이 폼 잡고 각 잡는데 신경 쓰지 말고 목숨 걸고 전장(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한다..우리나라는 지금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가만히 앉아서 일 시키는 사람을 더 높이 쳐준다.. [출처: 중앙일보] [월간중앙 단독 인터뷰] ‘국민의사’ 이국종이 의료계에 던지는 쓴소리
일을 시키는 원동력(돈 혹은 권력이고, 결국은 같은 것이다)을 갖고자 달려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야심만만 사람? 욕심 많은 사람? 그것을 향해 너무 내달릴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가 이 사회에 정착하기를 바란다.

2018년 5월 24일 목요일

트랜스포머용 권선기(winder)를 만들어 보자!

2018년 초여름의 DIY 프로젝트는 진공관 앰프용 출력 트랜스포머를 만들기 위한 권선기를 만드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완제품(진공관 앰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품(트랜스포머)을 만들기 위한 기구(권선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한 문장에 '만들다'라는 낱말이 세 번 쓰였다. 아주 간단한 기성품 와인더는 아래의 그림과 같이 생겼다. 공장에서는 모터로 구동하는 권선기를 쓸 것이 당연하므로 DIYer를 위한 수동 권선기는 그 수요도 매우 적고 국산품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파는 아래 사진의 것은 물건 자체는 그렇게 비싸지 않은데 부피에 비해 무거워서 배송료가 많이 나간다.



물레를 연상시키는 권선기도 있다. 다음은 반갑게도 국산이지만 일 년에 트랜스 한 조를 감을 정도의 DIYer가 집에 두고 쓰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출처 http://www.winder.co.kr/products/kor/p12DWH-10.asp (대아권선기술)

권선기는 비교적 간단한 기구이다. 동력과 전달장치, 보빈을 물릴 축, 그리고 몇 번이나 감았는지를 세는 계수장치를 튼튼한 바닥판 위에 고정하면 된다. 외국쪽 사이트를 뒤지면 다양한 아이디어를 볼 수 있다. 동력쪽은 크랭크를 손으로 돌리거나 수동 혹은 전동 드릴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카운터는 출입문 열림 경보장치에 쓰이는 리드 스위치에 만보계나 전자계산기를 '해킹'하여 쓰거나, 자기장을 감지하는 홀 센서에 전자식 카운터를 연결하기도 한다. 직접 만든 로터리 엔코더를 쓰는 사례도 보았다. 기계식 카운터는 구동축 회전에 따라서 표시창이 숫자가 증가하는 것도 있고, 라쳇 카운터라고 해서 레버를 누르는 동작에 따라서 숫자가 올라가는 것이 있다. 후자는 프레스 공장 등에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이런 기계식 카운터는 작동 속도가 높지 않아서 초당 3회를 넘으면 정확히 카운트하기가 어렵다. 리드 스위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운터가 없는 매우 간단한 권선기를 보자. 이것은 사실 트랜스포머 혹은 코일용 권선기가 아니다. 쥬얼리를 만드는 사람이 얇은 금속선을 말아서 세공할 때 쓰는 것 같다. 자작 사례는 여기에 잘 나와 있다.

출처 https://www.pinterest.co.uk/pin/331296116321023513/

나는 속도가 조절되는 Skill 전동 드릴을 동력장치로 쓸 예정이다. 대형 모니터의 벽면 고정용 부속이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이를 드릴의 손잡이에 고정하면 드릴 자체를 확고히 고정하는데 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닥판을 만들려면 약간의 목공을 해야 할 것이다. 톱질이 정말 두렵다! 아무리 그어 놓은 선을 따라서 자르고 싶어도 원하는대로 되지를 않으니 말이다. 전동 드릴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구멍을 뚫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직소가 있으면 좀 더 편할까? 사용 빈도도 높지 않고 소음과 분진(청소기를 연결하여 톱밥을 빨아내는 모델도 있다지만)이 심한 장비라서 아파트에서 이를 쓰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제부터 AliExpress에 필요한 부품을 주문하기 시작하였다. 보빈을 물어서 돌리는 회전축으로는 전산볼트라는 것을 쓸 것이다. 이는 'computational' 볼트가 아니라 머리 부분이 없이 전체에 나사산이 있는 볼트를 말한다. 천장에 덕트를 고정하기 위해 매다는 바로 그 볼트이다. 표준 길이는 1 미터라서 절단 및 나사산 마감 가공을 의뢰해야 한다.

출처 http://daebong19.co.kr/sub/sub02_01.asp?category=1501000000 (주) 대봉

길이는 150~200 mm 정도로 맞추려고 한다. 한쪽 끝은 드릴척에 고정하면 된다. 반대쪽 끝은 그냥 허공에 띄우거나 로드엔드 베어링을 연결하여 지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내 전동드릴은 스위치를 누르는 깊이로 회전수의 조정이 가능하다. 매우 낮은 속도에서도 감을 수 있도록 미세 조절 장치를 고안하는 것이 마지막 숙제이다. 보빈에 에나멜선을 차분히 감기에 적당한 속도를 전동 드릴로 얻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자전거 페달을 돌리듯 크랭크 기구를 만들어 천천히 감으려고 한다. 1차 코일만 해도 트랜스 두 개를 만드려면 4천번 정도는 감아야 한다! 에나멜선은 승리상사라는 곳에서 구입하면 된다.

동력을 전달하고 측정하기 위하여 어떤 부품을 고르고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이렇게 고심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내가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라면 너무나 쉽게 해결을 하였을 것이다. 납땜만 하던 것에 비하여 적성에 조금 더 맞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부품을 조사하다가 3D 프린터를 자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저렴한 직선 이송 기구로서 볼스크류가 아니라 전산볼트를 쓴다는 것도 알았다. 아두이노를 이용한 3D 프린터 자작을 한다면 무엇인가를 깎아서 만들고, 구동 장치를 꾸미고, 배선을 하고, 납땜을 하고, 나아가서는 프로그래밍까지 하는 모든 재미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너무 거창한 일이라면 권선기에 전동드릴이 아니라 속도제어장치가 구비된 DC 모터를 다는 정도의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5월 21일 월요일

독서 기록 - 나를 지키는 힘(임병희 지음)

나는 어떤 한계를 뛰어넘아야 할까. 노력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타성의 한계부터 넘어야 한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겸손을 가장한 자학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일단 내게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한계가 아니라 현재의 한계일 뿐이다. 이 한계를 한꺼번에 넘어설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씩 넘다보면 내 한계는 이전의 한계보다 넓어진다. 한계를 고정하지 말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또 얼마나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알게 하자. (본문 중에서)
 이 책의 부제는 '20인의 철학자가 전하는 삶의 중심 찾기'이다. 흔히 서양 철학 위주로 소개한 책과 달리 여기에서는 동양의 철학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많은 내용을 할애하였다.


저자 임병희는 국문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동북아시아의 신화를 연구하였다. 그런 그가 '오목수 공방'을 공동 창업하여 목수로 일하면서 강연과 저술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가 지난 2월에 인터넷에 남긴 글을 보자.

임병희의 신비한 단어사전 85화. 어른들의 놀이터 '공방' - 링크

그는 수도 없이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7년씩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왜 목수일을 하세요?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으세요? 그의 대답은 한결같다.

나는 나다.
나는 버린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그러면 책의 내용을 주목해 보자.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 것인가, 혹은 진실을 대면하고 '나로 살기' 위한 고달픈 여정을 떠날 것인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내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나를 살리는 공부를 하려면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즘 심리학에서는 지나친 자신감(과신)을 경계하라는 지적을 많이 한다. 이는 이 책의 주장과 상충하지 않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함인 반면 과신은 현 상태에 안주하게 만들어 오류를 범하는 요인이기 떄문이다,
과거 (존 스튜어트) 밀에게 감정과 느낌이란 증명할 수 없는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 그러므로 떨쳐내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감정을 거세한 채 살았다. 하지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 그를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구원해 준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바로 그 감정이었다. 밀에게 감정은 자각하지 못했던, 애써 외면했던 진짜 자기 자신이었다. (본문 중에서)
운명이라 생각하면 하기 싫은 일이지만,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비로소 나를 알아가는 공부에 힘을 실을 수 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남과 다른 차별화된 나를 만드는 일에 의지를 갖고 뛰어들라는 이야기이다.

방황과 변화를 사랑하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것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관계와 나를 둘러싼 세상 모두에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나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계속 과거 속에 살면서 미래를 걱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찰리 채플린)
 미토피아(me+topia)는 지금 여기에 펼쳐진 나의 일과 삶의 세상이다. 이는 책을 읽고 지식을 쌓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시간을 쏟아서 결국 바란 것을 이뤘다는 뜻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단호하고 굵은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었다.
 

2018년 5월 20일 일요일

독서 기록 - <위험한 자본주의> 외 네 권

이번 독서는 매우 비능률적이었다. 2주간의 대출 기간은 연장까지 했지만(요즘 자주 이러는 편이다) 두 권은 끝까지 읽지 못했고, 실제로는 대출 직후 삼사일 동안에만 집중적으로 독서를 하였다. 제대로 독후감을 쓰려면 책을 옆에다 놓고 뒤적이면서 해야 하는데, 오늘이 반납 마감일이라서 겨우 사진만 찍어놓고 서둘러 반납을 하고 말았다.

요즘 읽는 책은 경제 제도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것이 많다. 소련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라는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 북한의 핵 포기와 경제적 개방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 왜 이러한 사상이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올해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서 그의 사상이 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재조명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내년은 찰스 다윈 탄생 210주년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은 세계 사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거인이다.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은 토마 피케티의 저서이다.


누구나 미국인 수준의 윤택한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지구의 자원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소득 수준이 올라간 인도와 중국 사람들(그 수는 또 얼마나 많은가!)이 이에 '걸맞는' 소비를 하려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당신들마저 이렇게 살면 전 지구가 위태로워지니 제발 참으시오'라고 할 수 있는가? 성장은 꼭 필요한가? 자본주의는 경제적 성장(혹은 팽창)을 기본 전제로 하는데, 현재 세계는 과거 수준의 성장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성장이 없이도 번영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에 옮길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어느 나라든지 싼 가격에 공산품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에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필이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가까이 있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공해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는 취약점이 있지만 말이다. 욕망이 가득한 시대, 그리고 경제적으로 과도하게 국가간에 연결이 된 시대에는 다 같이 문제 의식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 위험한 자본주의 - 마토바 아키히로 지음|홍성민 옮김
  • 소비를 그만두다 -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정문주 옮김
  •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 류동민 지음
  • 있는 자리 흩트리기 - 김동연 지음
  • 창조적 자본주의 - 마이클 킨슬리 엮음|김지연 옮김

6N1 + 6P1 싱글 앰프의 보수 작업

방바닥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작업을 하면 좋지 않은 자세로 인하여 쉽게 피로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책상 위에서 작업을 하였더니 능률이 4배는 오른 것 같다. 이 진공관 싱글 엔디드 앰프의 가장 큰 문제는 전원 트랜스에서 '웅-'하는 소리가 난다는 점이다. 용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별도의 트랜스를 사용하여 히터 전원을 공급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오늘은 확실한 결론을 얻기 위하여 보유한 3개의 전원 트랜스를 이용하여 온갖 조합을 해 보고, 심지어 히터 전원을 직류로 만들어 보기도 하였지만 트랜스의 울림은 줄어들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것은 220V에 전원 트랜스를 두 개 병렬로 연결하면 항상 B 전원용 트랜스에서만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에서 발생하는 울림은 해결하지 못했지만 접지 처리를 함으로써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험을 대부분 줄일 수 있었다. 방법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1. PCB의 그라운드 단자에서 220옴 저항을 통한 접지
  2. 직렬로 연결한 220옴 저항 두 개를 초단 히터 전원에 병렬로 연결하고, 중간점을 접지(아래 그림 참조)
그림 출처: http://www.valvewizard.co.uk/heater.html
(1)과 (2)는 전부 한 점에서 섀시에 연결하였다. 트랜스의 접지선과 AC 인렛의 접지선은 섀시의 다른 한 곳에서 연결하였다. 속칭 '하모니카 단자'를 사용함으로써 연결 작업을 한결 수월하게 진행하였다.

1/4 와트 저항이면 충분한 것을 어쩌다 보니 5 와트 시멘트 저항을 사용하였다.
사각 구멍을 뚫어서 전원 스위치도 제대로 달았다.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줄질을 하는 요령이 생겼다.
다음으로는 출력관(2 x 6P1)의 히터 전압을 조정하였다. 내가 별도로 구입한 전원 트랜스는 1.2암페어 급으로 0V-9V-12V-15V-18V의 탭이 있는 것이다. 12V-18V 탭에서 6V를 뽑아내어 진공관 히터에 연결하면 5.7V 정도로 전압이 낮아진다.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5% 오차를 감안해도 이는 약간 낮은 수준이다. 그래서 9V-18V에서 충분한 전압을 뽑아낸 뒤 시멘트 저항을 적절히 조합하여 직렬로 배치함으로써 히터에는 6.17-6.18V가 걸리게 만들었다. 12V-15V 탭에는 LED 파일럿 램프를 달았다.

마지막으로 PCB에 35 mm 서포트를 달아서 진공관이 전면 창에서도 잘 보이게 만들었다. 


8.2옴 저항 3개를 병렬로 연결하였다.

전면 패널을 고정하는 것은 마지막 숙제로 남겨두자.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칠면서도 시원한 소리가 난다. 여기에 R-core 출력트랜스를 연결한다면 화룡점정이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는 수동 권선기를 자작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기성 제품을 사는 것이 현명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3월말에 시작된 진공관 앰프 자작 프로젝트는 많은 시행착오와 사고, 부상,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고 중간 결론을 내리자.




2018년 5월 16일 수요일

Genome assembly graph의 시각화 도구 "Bandage"

이틀 전에 Ryan R. Wick의 hybrid assembler인 Unicycler를 소개한 바 있다(원문 링크). Wick는 이보다 앞서서 genome assembly graph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소프트웨어를 먼저 개발하여 발표하였었다. Bandage는 운동선수들이 몸에 칭칭 감는 붕대 혹은 반창고를 연상시킨다. 실제 표현되는 결과물이 이를 닮았다. 하지만 Bandage는 논문 초록에 의하면 Bioinformatic Application for Navigating De novo Assembly Graphs Easily의 약자라고 한다.
Bandage: interactive visualization of de novo genome assemblies. Bioinformatics. 2015 Oct 15;31(20):3350-2 PubMed GitHub Documentation
처음에는 리눅스에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Qt 5 등 prerequisite가 많아서 윈도우에 깔아버렸다. 우분투라면 좀 더 편하게 설치가 가능했었을 것 같다. 논문에서 소개한 그림을 보자.

PMC full text: Bioinformatics. 2015 Oct 15; 31(20): 3350–3352.

다음 그림은 Unicycler로 조립한 어떤 장내 미생물의 유전체를 Bandage에서 그려본 것이다. 이 결과물은 --mod bold 옵션을 주어서 조립한 것이라 매우 단순하고 완성도가 높은 구조를 보여준다. 대신 misassembly의 가능성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유전체 조립 결과물이라 하면 FASTA 파일로 표현된 contig 혹은 scaffold 서열을 전부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Velvet, SPAdes, Trinity, MEGAHIT 등 많은 assembler들이 그래프 형식으로 표현된 결과물을 같이 제공한다. Unicycler에서는 GFA format의 결과를 제공한다. Bandage가 지원하는 입력 파일을 알아보자.
Bandage currently supports loading assembly graphs in the LastGraph format (used by Velvet), the FASTG format (used by SPAdes and MEGAHIT), the Trinity.fasta format (used by Trinity), the ASQG format (used by SGA and StriDe), and the GFA format (used by ABySS and other programs). If you are using IDBA, check out this tool for converting an IDBA graph into GFA format. See assembler differences for more information. (출처 링크)
일루미나와 PacBio 시퀀싱 결과를 나름대로 이용하여 완성한 미생물 유전체 정보를 여럿 등록하고 논문으로 이미 발표하였었는데, Unicycler와 Bandage를 뒤늦게 접하게 되니 이들을 재평가하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sequencing raw data를 SRA에 등록하여 공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SRA에 제출한 그대로의 long read raw data, 즉 HDF5 파일(.h5)을 그대로 다운로드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한 것 같다. 오직 fastq-dump로만 파일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h5 파일이 있으면 일부 프로그램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지만 fastq/fasta로만 받으면 사용의 폭이 약간 좁아진다. 물론 내가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며칠 동안 조사하고 궁리한 것은 (주)MDxK로부터 이번 월말에 개최하는 PacBio User Group Meeting에서 발표를 의뢰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따금씩 발표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내가 경험한 것을 정리하고 최신 동향을 조사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2018년 5월 14일 월요일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JIFF) - 영화 <검열자들>을 보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2018.5.3~12.)의 마지막날, 아내와 함께 일주일만에 다시 전주를 찾았다. 개막 직후였던 어린이날(지난 토요일)에는 거의 모든 관람권이 매진된 상태여서 영화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봐야만 했었다.



선택한 영화는 Has Block과 Moritz Rieswieck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검열자들(The Cleaners; JIFF 링크)>이었다. 필리핀 마닐라 도심의 복잡한 밤거리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거의 즉각적으로 'Delete','Ignore'를 반복한다. 이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유튜브 등에 올라오는 사진과 동영상들을 직접 검토하면서 부적절한 것을 제거하는 일이다. 이들이 하루에 검열하는 자료는 총 25,000건이다. 이러한 서비스를 개발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고달픈 검열 작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지구 반대편의 값싼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곳에(영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도 큰 이유이리라) 용역을 주는 것이다. 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생활을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도 있고, 세상이 더 도덕적인 곳이 되기를 바라는 신념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content moderator')은 겨우 삼사일 정도의 교육을 받고 실무에 투입된다. 음란물, 폭력물, 잔혹물 등을 정해진 기준에 의해 재빨리 판단하여 1-2초 안에 삭제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풍자적인 예술가의 작품(예를 들어 성기를 노출한 트럼프의 누드 그림 - 물론 그 성기의 크기는 매우 작다!)이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의 실상을 전하는 정보, 그리고 다소 충격적이라서 일간지에는 직접 싣기 어렵지만 중요한 사건을 전달하는 사진들이 삭제된다. 하루종일 이런 정보를 보면서 일을 하는 검열자들의 정신건강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한 몇 명은 일을 그만 둔 상태에서 촬영에 임하였다. 자살과 관련한 동영상을 너무 많이 접한 검열자는 어느날 아침 출근을 하지 않았다. 동료가 집에 찾아가 보니 이미 목을 맨 상태였다.

아동 포르노, 자살 동영상, ISIS의 참수 동영상, 폭탄 제조법, 테러와 관련된 정보 등은 없애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아의 한 사례를 보자. 한 단체에서는 민간인 지역에 벌어진 공습의 피해를 지리 정보와 함께 올려서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검열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동영상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삭제하게 된다.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영상을 업로드한 의도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터키는 최근 언론 통제를 강화하면서 Social Network Service 제공자에게 자국 정부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수록한 사이트를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그 나라에서의 비즈니스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 요청을 수락하고 만다. 나중에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이를 거부한 사례가 있는지 물어보니 구글에서는 그러한 요청사항이 있었고 거절하였음을 별도로 공지한다고 하였다.

인종 간 혐오를 부추기는 가짜 뉴스 사태(미얀마), 범죄자에 대한 비인권적·초법적인 대처로 논란에 있는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가짜 저널리즘을 통해 인기를 얻는 연예인(필리핀) 등 영화에서는 Social Media가 어떻게 악용되는지, 그리고 이를 개발한 사람들은 단지 기술은 중립적인 것이라며 어떻게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영화에 삽입된 마크 저커버그의 강연 모습을 보자. 서로를 하나씩, 하나씩 연결하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겠다고. 그들은 기술을 제공했을 뿐이고, 결국 모든 책임은 정보를 업로드한 개인이 지라는 태도가 역력하다. 검열 작업을 필리핀에 아웃소싱한 것은 그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다.

영화 상영을 마친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나도 질문을 던졌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보를 업로드하고 공유하면서 풍부한 정보 속에 세상은 더욱 자유롭고 민주적인 곳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사람은 늘 존재한다. Social Network Service를 제공하는 사람은 결국 사람들이 많이 클릭하여 보는 것,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는 정보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바로 광고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정보 특히 잘못된 여론을 만들 목적으로 올리는 정보에 대해서는 차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 인공지능이 더욱 발달하여 사람이 개입하지 않고서도 자동적인 차단 또는 삭제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앞뒤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은 아직까지는 인간이 더 나은 것 같다.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열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생각해 보라. 기술은 너무나 빠르게 발달하는데 반하여 이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일단 감정과 '악의', 그리고 숨은 의도를 쏟아내기에 너무나 바쁘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드루킹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이 무엇을 검색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그리고 왜 키보드 위에서는 그렇게 무례해지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이나 생각을 자기만의 범주에 가두어서 혐오를 부추기는 것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무거운 영화였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를 끊임없이 캐고 물어보는 것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아닐까? 비록 해법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겠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로 해결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추억할 사진 두 장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신개념의 hybrid assembler "Unicycler"

PacBio long read만을 이용한 (hierarchical) nonhybrid genome assembly가 대세라고 한다. 아니다! 이 진술은 틀렸다. 왜냐하면 ONT(Oxford Nanopore Technologies)의 기술로 생산되는 long read도 있기 때문이다. Long read sequence data를 이용한 nonhybrid assembly tool을 서로 비교하는 논문까지 나왔다.
Comprehensive evaluation of non-hybrid genome assembly tools for third-generation PacBio long-read sequence data. Brief Bioinform 2017 PubMed
그럼에도 불구하고 short read와 long read를 함께 사용하는 hybrid assembler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세균 유전체 해독 전용 도구임에 유의해야 한다. 교신저자를 겸한 제1저자는 호주 멜버른 대학의 Ryan R. Wick이다.
Unicycler: resolving bacterial genome assemblies from short and long sequencing reads. PLoS Comput Biol 2017. PubMed GitHub
출처: https://github.com/rrwick/Unicycler
 Unicycler라고 하면 '외발자전거를 타는 사람'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Hybrid assembly의 장점은 무엇인가? Short read로부터는 정확성을, long read로부터는 structural resolving power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hybrid assembler라고 하면 long read에 short read를 매핑하는 과정을 먼저 실시하여 long read의 error를 줄인 뒤 일상적인 방법으로 조립을 하는 long-read-first approach를 떠올린다. 하지만 Unicycler는 short-read-first approach를 택하였다. Short/long read는 물론 hybrid assembly도 잘 해주는 SPAdes를 이용하여 먼저 short read로부터 contig를 얻는다. 각 contig에는 copy number를 할당한 뒤 bridging을 하여 graph 구조를 단순하게 만든 뒤, long read를 mapping하여 최적의 path를 찾아나가면서 이를 점차 병합해 나감으로써 완성 상태의 염색체 서열을 얻는다. 마지막으로는 Pilon을 이용하여 작은 레벨의 오류를 수정한다. 논문에 소개된 그림이 이 과정을 매우 심플하게 설명하고 있다. Short-read-first approach는 long read의 depth가 충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출처: PubMed Central
설치도 아주 쉬웠다. BioConda를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용자가 추가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racon(Consensus module for raw de novo DNA assembly of long uncorrected reads) 역시 BioConda에서 제공한다. 몇 가지의 long read assembler와 manual join을 통해서 만든 genome assembly 결과 중 석연치 않은 것들을 가져다가 Unicycler로 테스트 조립을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다루어 본 long read assembler 중에서는 Canu가 가장 쓰기에 편리하였었다. 그 다음은 SPAdes 정도? HGAP은 리포트도 충실하고 다 좋은데 실행 속도는 매우 느리다. 빨리 SMRT Link v5.x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아직도 SMRT analysis v2.3을 쓰고 있다. 만약 이번의 테스트 실행 결과가 잘 나와준다면, Unicycler도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2018년 5월 12일 토요일

Shuttle XPC SG335G 케이스에 자리잡은 6P1 + 6N1 진공관 싱글 앰프

약 이틀에 걸친 작업 끝에 안쓰는 컴퓨터 케이스에 진공관 앰프를 조립하였다.

발열이 심해서 앞 커버를 씌우지 못하였다. 
공개하기 매우 부끄러운 배선 상태.
 

볼륨 놉을 바꾸기 전의 상태.
두께 1 mm의 알루미늄 케이스라 가공을 하기는 매우 쉬웠다. 하지만 못쓰는 PC용 파워 서플라이에서 얻는 피복 선재는 생각보다 납땜이 잘 되지 않았다. 색깔로 보아서는 주석도금선이 분명한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인두가 과열되어서 그런 것인지?

주문 제작한 전원 트랜스를 처음 사용하였을 때 '웅-' 또는 '쉿-'에 가까운 트랜스의 자체 잡음이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전원을 통한 직류의 유입, 트랜스의 함침 불량 또는 트랜스의 용량 부족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제이앨범에서는 용량 부족의 가능성을 가장 크게 제시하였었다. 이에 따라서 사무실로 앰프를 갖고 나가서 다른 앰프의 전원트랜스를 이용하여 출력관 히터용 전력을 공급하였더니 더 이상 잡음이 나지 않게 되었다(관련 글 링크). 

테스트용으로 사용한 트랜스는 너무 덩치가 커서 6V/1.2A가 나오는 트랜스(IC114 링크)를 별도로 구입하여 출력관 히터에 연결하였다. 그런데 메인으로 쓰는 전원 트랜스가 울기 시작하였다. 이럴 수가 있는가? 사무실에서 테스트용으로 사용하던 트랜스를 연결하니 그래도 운다.

도대체 이해를 하기 어렵다. 사무실과 집의 전기 환경이 달라서 그런가? 전원 트랜스 세 개를 놓고서 별의별 조합을 다 해 보았지만 울림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연결을 새로 하느라 트랜스의 리드선은 점점 짧아지고 말았다.

결국은 메인 트랜스 하나를 가지고 B+ 전원과 모든 히터의 전원을 공급하도록 연결한 뒤 조립을 마쳤다. 조금 떨어져서 들으면 참을 수 있는 수준이므로. 전원 트랜스를 가지고 더 실험을 하려면 단자대를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018년 5월 11일 금요일

프로바이오틱의 부작용

프로바이오틱스 먹고 패혈증? 50대 女, 20일만에 사망
"프로바이오틱"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오늘 접한 뉴스이다. 사망한 사람의 패혈증이 복용 중이던 프로바이오틱스와 연관이 있음을 입증하려면 패혈증을 일으킨 세균을 분리하여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의 구성 미생물과 동일한지를 살피면 될 것이다. 유익한 미생물이므로 많이 먹어도 별다를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나 역시 심각하지 않게 생각했는데, 부작용이 있다는 보고가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있는 세균 배양체 덩어리이니 건강 상태가 좋지 않거나 면역 기능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화관 내로 들어간 미생물이 어떻게 하여 혈중을 떠다니는 심각한 감염을 유발하게 되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위나 장에 생긴 상처를 통해 세균이 침입할 수도 있을 것이고, 요즘 널리 이야기되는 intestinal integrity(혹은 gut integrity)에 문제가 생겨서 그랬을 수도 있다.

구글에서 학술 논문을 몇 개 찾아보았다.

Lactobacillus rhamnosus administration causes sepsis in a cardiosurgical patient—is the time right to revise probiotic safety guidelines?  Clin Microbiol Infect. 2011 Oct;17(10):1589-92. doi: 10.1111/j.1469-0691.2011.03614.x. Epub 2011 Aug 16. PubMed
심장 판막 수술을 받던 24세 여성 환자가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혈액에서 검출된 Lactobacillus rhamnosus는 이 환자가 먹던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에 들어있던 것이다. 장기부전, 면역기능 저하 및 gut barrier가 정상이 아닌 환자가 프로바이오틱을 먹으면 감염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안전 가이드를 수립할 때이다.
Risk and Safety of Probiotics. Clin Infect Dis. 2015 May 15; 60(Suppl 2): S129–S134. PMC
프로바이오틱은 일반적으로는 안전하다고 여겨지지만, 다음과 같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systemic infections, deleterious metabolic activities, excessive immune stimulation in susceptible individuals, gene transfer and gastrointestinal side effects
The efficacy and safety of probiotics in people with cancer: a systematic review. Ann Oncol. 2014 Oct;25(10):1919-29. doi: 10.1093/annonc/mdu106. Epub 2014 Mar 11. PubMed
암환자에게 프로바이오틱스를 투여하면 설사가 호전되는 혜택이 있지만 이들은 면역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므로 다른 부작용을 겪을지도 모른다. 1530명의 환자를 포함하는 17 종류의 연구를 통해서 다섯 건에 대해서는 프로바이오틱스와 연관된 감염이 증거를 확인하였다. 이 연구에 대한 쉬운 설명(영문)은 여기에 있다.
최근 나 역시 외국의 전통 유제품에서 분리된 Lactobacillus rhamnosus 균주의 비교유전체 분석을 위해 공부를 하다가 이 종에 속하는 균주들이 임상 시료, 즉 환자의 혈액에서 분리된 경우가 매우 많음을 알고 꽤 놀랐다. 프로바이오틱이 분명히 좋은 점이 있지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일부 사람에게는 그 효능보다 해악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식품 형태로 섭취하는 프로바이오틱이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먹어서는 위산과 담즙이 엄청난 공격에도 살아남아 장까지 도달하는 세균의 수는 매우 적다. 대신 배양한 생균을 먹으면 - 요즘은 여러 형태로 제제화를 하여 생존률을 더욱 높일 수 있다 - 민감한 사람에게는 감염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양날의 칼이다.

프로바이오틱은 건강에 좋을 수도 있지만, 그저 식품 상태로 풍미를 즐기며 기호품처럼 먹을 때가 가장 편안하였다.

2018년 5월 10일 목요일

진공관 앰프용 출력 트랜스포머(J-50 core 사용)까지 감게 되다니...

제이앨범에서 설계하고 제작한 J-50 코어를 드디어 입수하였다.


J-50 코어의 외형 치수. 이미지 출처: jalbum


C core와 유사하지만 단면이 원형이라는 점이 다르다. 폭이 다른 얇은 철판을 겹쳐서 원형 단면의 사각 도우넛 모양을 만든 다음 중간을 잘라낸 것이다. 전문 제작소에서 사용하는 R core는 원래 다음과 같이 생겼다. 네모난 도우넛 모양으로서 중간에 절단을 하지 않는다.

출처: http://softone.a.la9.jp/english/RW20.htm
왜냐하면 전문 제작소에서는 자동 권선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DIYer들은 보빈에 에나멜선을 감아서 조립을 해야 하므로 가운데가 잘린 R 코어를 써야만 한다. 그리고 싱글 진공관 앰프의 출력 트랜스포머로 사용하는 경우 출력 전류에 직류 성분이 있으므로 코어가 자화된다. 따라서 자기력선을 끊기 위해서 air gap을 주어야 하므로 코어를 잘라야만 한다. 만들어진 뒤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된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순수히 교류 전류만 흐르는 전원 트랜스라서 갭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출처: http://jamestransformer.com/en/transformer/R_core_transformer.html
직접 선을 감아서 5 kOhm : 8 Ohm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선재의 구입, 보빈 대용물의 제작, 수동식 권선기(사례 링크) 마련 등 할 일이 많다. 감는 방법과 회수 등의 정보는 충분히 입수해 두었다. 핵심 부품은 구했지만 실제 제작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한다. 오늘 저녁에는 컴퓨터 케이스에 6P1 + 6N1 싱글 앰프를 재조립해 넣는 일을 대충 마쳐야 한다.


2018년 5월 8일 화요일

[하루에 한 R] heatmap.2() 그림을 그릴때 성가신 것 바로잡기

아래의 예제 그림에서와 같이 "Color Key and Histogram"이라는 라벨이 두 줄로 표시되면서 바로 아래의 그림과 바싹 붙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주 보기에 좋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이 그림의 위치를 heatmap 바로 위로 옮기면 그림을 그릴 영역의 폭이 넓어지는 셈이므로 Color Key and Histogram이 한 줄로 펼쳐지면서 바로 아래의 color key 그림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열될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heatmap.2() 함수를 통하여 그려지는 것은 1. heatmap, 2. Row dendrogram, 3. Column dendrogram, 그리고 아주 성가신 4. Key이다. 이것은 lmat/lhei/lwid라는 매트릭스를 이용하여 그 위치와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상세한 것은 다음의 페이지에 잘 나온다.

Moving color key in R heatmap.2 (function of gplots package)

그런데 실제로 lmat 3x2 매트릭스로 재조정한 다음 key를 오른쪽 위에 오게 해도 여전히 Color Key and Histogram은 두 줄로 표시되었다. 이 라벨 자체의 크기를 줄이면 한 줄로 표시되면서 그림이 예쁘게 표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heatmap.2(x,...,key.par=list(cex=0.7)) 방식을 사용해 보았지만 key에서 표시되는 모든 글씨가 전부 줄어듦에도 불구하고 Color Key and Histogram은 절대로 한 줄에 표시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방법도 가능하다. Histogram을 꼭 key에 표시해야 하는가? 이는 heatmap.2() 함수 안에서 density.info="none"이라는 인수를 설정하면 된다.



아주 훌륭하다. 아직도 불만스러운 점이 남았는가? 그렇다 key의 위아래 폭이 너무 크다. 다시 말해서 높이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이는 lhei 인수를 적절히 수정하면 된다.


맨 마지막 그림에서 사용한 설정은 heatmap.2(x,...,cexCol=1,cexRow=0.7,margins=c(4,20),density.info="none",lhei=c(1.5,7))이다.

오늘 살펴본 heatmap.2() 함수의 조작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였다.

Heatmaps in R, two ways

진공관 앰프용 출력 트랜스포머를 감아보자

내가 이 일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직 필요한 부속(R 코어)이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에나멜선을 감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단계에 왔다.

트랜스포머는 가장 흔하게는 가정용 교류전기를 원하는 전압으로 낮추거나 심지어 높이는(진공관 앰프에서는 200 V를 훨씬 넘는 고전압 직류가 필요) 용도, 즉 전원트랜스포머로 사용하며, 진공관의 출력단에 연결하여 임피던스를 맞추는 용도로도 사용한다. 내가 직접 만들고자 하는 것은 후자인 출력 트랜스포머이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가전제품을 작동시키기 위하여 무거운 트랜스포머로 전압을 낮춘 뒤 정류하여 직류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요즘은 SMPS(switching mode power supply)라는 훨씬 가볍고 효율이 높은 전원장치가 널리 쓰인다.

트랜스포머의 원리는 보통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설명을 한다.
하지만 실제 저렇게 생긴 코어(철심)에 에나멜선을 감지는 않는다. 교류전압의 변환용으로 쓰이는 일반적인 트랜스포머는 영문자로 E자와 I자처럼 생긴 코어를 이용한다. E 자의 가운데 축에 에나멜선이 감긴 보빈(bobbin)이 들어간다. 트랜스포머의 용도에 따라서 코어의 재질도 달라진다고 한다.


트랜스포머의 코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오디오용으로 트랜스포머를 DIY하려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개략적인 내용은 Transformer basics 페이지를 참조해 보라. 나는 제이엘범에서 J-50이라는 R 코어를 한 조 주문한 상태이다. 코어의 단면은 원형에 가깝고 직경은 22.1 mm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보빈이 들어가는데 무엇으로 보빈을 대신해야 될지, 또한 실제로 어떻게 권선을 해야 하는지를 공부하는 중이다. 한쪽 보빈에 1차 권선을, 다른쪽 보빈에 2차 권선을 몰아서 감으면 가장 단순하겠지만 전원 트랜스포머가 아니라면 실제로는 이렇게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임피던스 비율이 5 kOhm : 8 Ohm이라 가정하면 권선비는 25:1이다. 이를 개별 보빈에 따로 감으면 두께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서 코어에 넣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반씩 나누어서 감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보빈에 1차와 2차가 같이 감겨야 하는데, 1차를 다 감은 후 2차를 감을 것인가, 혹은 한 켜씩 번갈아 감을 것인가? 그 사이에 절연지를 넣어야 하나? 그리고 2차에 8 Ohm과 4 Ohm 탭을 같이 내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출력 전압은 권선비에 비례하지만 임피던스는 권선비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2차 권선이 100회(8 Ohm)라고 하면 4 Ohm 은 50회째가 아니라 70.7회 감은 곳에서 탭을 내어야 한다. 제이앨범에서 제공하는 권선 보빈의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링크).

1차와 2차의 감은 비율(권선비)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몇 회를 감았는지도 중요하다. 에나멜선의 두께도 잘 골라야 한다. 너무 두꺼운 것을 쓰면 원하는 만큼을 다 감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짧은 경험으로 말하자면 진공관 앰프 제작의 꽃은 섀시 및 트랜스포머의 제작이 아닐까 한다. 진공관 자체는 이미 제조된 것을 사용해야 하므로 새로운 회로를 만들거나 기존의 회로를 개선하는 것 말고는 창의성을 발휘할 곳이 많지 않지만, 트랜스포머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예측하기 힘들고 까다로운, 그러나 잘 감으면 기성품 못지않은 가격대비 성능비가 나오는 부품이 바로 (출력) 트랜스포머일 것이다.

2018년 5월 6일 일요일

모든 아버지는 떳떳하다

아내와 함께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5/2-5/12)를 찾았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전주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으나 무료 주차장인 전주초등학교 운동장은 이미 만차였다. 근처 공터에 주변 교통이 방해되지 않게 차를 세우고 영화의 거리로 향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갖지 않고 들른 <고베식당>은 꽤 알려진 맛집이었던 것 같다. 점심식사와 더불어 맥주를 들었다. 맨 처음에 소개한 사진 속의 내 얼굴이 낮술로 인해 약간 벌겋게 보일 것이다. 영화의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전주는 먹을거리와 볼거리 측면에서 이미 엄청난 경쟁력을 갖춘 곳이라서 영화제를 홍보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객사길을 거닐다보면 대전의 어느 상가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전주의 원도심은 이렇게 훌륭하게 부활하고 있는데, 과연 대전은?


CGV 전주고사점에서 현장 매표를 하려 했더니 일부 애니매이션 영화 말고는 전부 매진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비도 부슬부슬 오는데 모든 상영관을 찾아서 남아있는 표를 찾을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영화제와는 관계가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조이앤시네마>에서 <어벤져스 인피티니 워>를 보았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7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다섯 번을 보면 한 번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멤버십 쿠폰을 발급해 준다는 것은 애써 거절하였다. 이런 것을 챙기는 것을 워낙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니 언급하지 않겠다. 제대로 된 결말은 다음 편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영화, 너무나 많은 영웅들이 한번에 등장하는 영화에 과연 내가 계속 흥미를 놓지 않게 될지 도무지 모르겠다.

<조이앤시네마>는 매우 생소한 영화관이다.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국내 3대 거대자본 멀티플렉스사의 틈바구니에서 상영 전 광고도 하지 않으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멀티플렉스 3사 worst 10(링크)'를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영화 상영 직전, 곧 다가올 어버이날을 겨냥한 듯한 공익광고 비슷한 영상을 보았는데, 오늘의 글 제목은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0개월 미만의 아이를 둔 젊은 아빠 네 명을 불러놓고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지갑 속에 아이의 사진은 몇 장이나 있는가?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이 언제인가?'라는 질문지에 답변을 하게 하였다. 모두들 흐뭇한 표정으로 답안을 작성하였다. 그 다음에는 '아이'라는 말을 '아버지'로 바꾼 똑같은 질문지를 주었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사진이 지갑 속에 있는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은 언제인가?' 참여자들의 표정에는 미안함과 난처함이 역력하였다. 자기들의 아이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애정을 갖고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의 아버지에 대한 같은 질문은 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알지 못하므로). 바로 그때, 참여자들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서 찍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들이 인터뷰에 남긴 말은 한결같았다. '자랄 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참여자(젊은 아빠이지 아들)들은 전부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때 참여자들의 아버지들이 예고 없이 손자들을 안고 나타나서 감격스런 만남을 갖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여자들은 전부 남자들이었다.
하... 너무나 상투적인 스토리. 억지스런 감동 자아내기. 만약 내가 서너살짜리 아이를 둔 아버지라면 이 공익광고 영상에 약간은 공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상에 나오는 '할아버지'들과 가까울 정도로 나이가 먹은 현재 나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부모도 그러했고 나도 그러했고 우리는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육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물론 '더' 잘해주지 못했음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왜 모든 부모에게 죄책감을 안기는가?

자녀들이 자랄 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이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보편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해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맛난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교육을 시켜주고, 더 나아가서는 결혼할 때 번듯하게 집을 마련해 주고... 이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자녀를 돌보고 보살피는 일에 대해서 남들만큼, 있는 집에서 하는만큼 해 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다. 이런 기준이라면 세상의 그 어느 부자라고 해도 부족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면 정반대로 생각해 보자.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공부를 기대한 것만큼 못해서 미안하고, 형제간에 자주 싸워서 미안하고,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독립하지 못함을 미안해 해야 한다.

부모가 갖는 이 미안함을 이렇게 바꾸면 안될까? 무엇이 옳은 삶인지를 늘 생각하게 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마음을 갖고.. 이 사회가 필요로하는 올바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가르치지 못했음에 대해서 미안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 아닐까?
불의를 보아도 나서지 마라. 너 하나만 다친다. 엄마 아빠가 노력해서 좋은 대학 보내주고 좋은 직장에 가게 하고 결혼도 꿀리지 않게 하도록 다 준비해 줄께. 손주 낳으면 얼마든지 돌봐주마.
대학은 부모가 '보내는' 것도 아니고, 결혼 역시 부모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부모의 길은 자녀로 하여금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나갈 수 있는 자질을 키워주는 것이다.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이런 것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이 공익광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잊지 말자는 것이 틀림없다. 즉 그 영상에 출연한 젊은 아빠 또래의 사람들을 타겟으로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 타겟이 아닌 나는 이토록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이 영상에 대해서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만약 아버지에 대한 질문지를 접하고 젊은 아빠들이 미안함을 느끼면서 부모님을 오랜만에 찾아가 만나는 것으로 끝났다면 더 자연스럽고 좋지 않았을까? 갑자기 나이든 아버지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면서 한결같이 자녀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한다는 것이 옳은가?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남부럽지않게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자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들이여, 떳떳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