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회의를 겸한 점심 모임에서 ETRI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도입부를 써 놓고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른바 존대어 범람시대(참고할 글: 접미사 '-분', '-님', 고객분, 고객님, '손님'인가, '손님분'인가)가 되어 어색한 표현이 너무 많아진 것에 대하여 나도 매우 비판적이다.
아이디어 회의를 겸한 점심 모임에서 ETRI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쓰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만약 그 대상에 기관장 등 주요 경영진이 포함되어 있다면? 아,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모임에서 떠오른 여러 화제 중 인조 눈(眼)을 구현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망막에 맺히는 상을 어떻게 전기 신호로 전환할까에 대한 것이 관심사였는데, 나는 이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망막을 전자 회로로 대체하고 이를 전기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마치 헤어 드라이어의 전원 케이블이나 휴대폰 충전기 케이블이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연결 부위가 쉽게 망가지듯이 계속되는 안구의 움직임에도 잘 견디는 특수한 전도성 케이블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울 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그랬더니 '망막은 고정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 생물학자 아니셨던가요?'하는 반문을 들었다. 어? 정말 그런가? 순간적으로 나는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었는데, 모임을 마치고 와서 생각해 보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카메라를 생각해 보자. 카메라가 움직이면 필름도 따라 움직인다. 빛의 다발이 카메라를 통과해서 카메라 뒤편의 고정된 필름에 상이 맺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눈알도 이와 같은 방식이 아니었던가? 단지 좁은 공간 안에서 쉽게 회전할 수 있도록 구형으로 생겼을 뿐.
갑자기 눈알의 해부학이 궁금해졌다. 눈알은 얼마나 큰가? 시신경과 근육은 어떻게 눈알에 붙어 있나? 안구는 멋지고 예의 바른 낱말이고, 눈알은 그렇지 않은 낱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 안구의 평균 지름은 24 mm로, 골프공(42.67 mm)이나 탁구공(40 mm)보다 훨씬 작다.
바로 위의 글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해부학 실습 참관기 '조심스레 적출한 안구는 탁구공보다 작았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내가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부분을 묘사한 문장을 찾아 보았다.
막 적출된 안구는 흔히 영화 등에서 묘사되는 매끈한 탁구공 모양이라기보다는 안구의 절반 이상이 뒤쪽에 끈이 달린 치밀한 그물 같은 조직에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끈은 안구에서 뇌로 이어지는 시각신경 다발이고, 치밀한 그물 조직은 눈을 둘러싼 근육들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망막은 당연히 안구와 일체이며, 안구 전체와 함께 움직인다. 안구의 회전에 따라서 시신경 다발이 얼마나 느슨해졌다가 팽팽해지는 것을 반복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PIXELSQUID 웹사이트에 가면 안구의 해부학적 3D 이미지를 직접 돌려 볼 수 있다. |
수정체와 홍채는 현재의 카메라 기술로 비교적 쉽게 구현 가능할 것이다. 배터리 교체 문제의 해결 방안은 나도 잘 모르겠다. 혈액으로부터 공급되는 영양물질(예: 포도당)을 이용하여 전기 에너지를 발생하는 기술이 생긴다면 정말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이미 생체전지연료라는 이름으로 proof-of-concept 수준으로 구현이 된 기술이다('몸속에서 전기 생산하는 섬유전지 나왔다', 2018). 실용화 수준은 아직 찾아보지 않았다.
휴대폰에 들어가는 카메라 모듈을 생각한다면 직경 24 mm의 인공 안구에 넣을 시각 센서는 충분히 작게 만들 수 있다. 역시 전원 공급 방법을 해결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를 시신경과 인터페이싱하는 기술을 해결해야 한다. 위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는 단순 무식하게 인공 눈알 뒤에 마치 하네스 케이블과 같은 다발을 연결하는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보다 현명한 엔지니어라면 이런 방식 대신 인공 눈에 붙은 센서와 시신경을 직접 연결하는 기술을 먼저 개발할 것이다.
나는 염기서열 해독 결과를 매만지는 분자생물학자/유전체학자일 뿐, 눈을 인공화하는 현대 공학기술이 어느 수준으로 발전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자료를 조금 검색해 보니 디지털 카메라에 쓰이는 반도체 센서에 시신경을 인터페이싱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접근 방식으로 보인다. 차라리 스탠포드 의과대학의 The Stanford Artificial Retina Project 웹사이트부터 읽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연구의 목표는 이식 가능한 인공 망막을 개발하는 것이다. 황반변성 등 요즘 점점 흔해지는 망막 질환을 생각하면 대단히 유용한 기술임은 자명하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이런 만남이 선례에 집착하지 않은 창의적 발상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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