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0일 일요일

논문과 연구노트 사이

우연히 접한 어떤 사건으로부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강력한 연관성이 있음을 느끼고 둘 사이를 아우르는 '그 무엇인가'를 좀더 깊이 탐구하기 위해 조사를 하고 궁리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서울대 전주홍 교수의 연구윤리 특강(관련 글 링크)과 거의 20년 전의 연구노트를 들추어서 대장균 B 균주의 유전체 해독 스토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그렇다. 

전주홍의 책 <과학하는 마음>. 출장길까지 따라온 좋은 동반자가 되었다.

과학이란 연구 현장에서 복잡하게 뒤엉킨 상태로 존재하는 온갖 가설과 연구 결과, 동료 과학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 중 취할 만한 것을 우리가 '과학'이라 믿는 사고 체계 안에 질서정연하게 배열하는 것에 더 가깝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결론 중 하나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다른 활동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예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꽤 오랜 기간 동안의 바깥 활동(기업 연구소와 정부 파견)을 거쳐서 연구소로 돌아와 관리자의 입장이 된 지금은 개인 차원의 연구 활동을 하기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K-BDS에 등록할 '유물' 수준의 데이터를 정리하기 위해 예전에 작성한 연구노트를 다시 들추어 보면서 당시 열심히 몰두했던 업무가 과연 올바른 자세와 방법을 통한 것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K-BDS에 등록한 바이오프로젝트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부 올해 등록한 것이다.

내가 K-BDS에 등록하려는 것은 논문을 내기 위해 GenBank에 등록했던 최종 자료(이것은 이미 전 세계에 공개된 것이니 재등록할 필요가 없다)와 sequencing raw data 사이를 잇는 '이야기'에 해당한다. 물론 일차적인 목표는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고 서버 속 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만 머물러 있던 raw data에 적당한 설명 문서를 달아서 등록하는 것이다. 그러면 Sanger나 454 등 구식 시퀀싱 기술에 관심이 있는 그 누군가가 이를 다운로드하여 이리저리 조립하고 뜯어 보면서 '아, 과거에는 이런 방식으로 유전체 연구를 했구나'하고 체험해 보기를 기대한다. 즉 내가 등록하는 자료가 일종의 유전체 박물관의 전시품 또는 소장품 역할을 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Raw data 등록과 더불어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raw data를 매만져서 논문 발표를 하기 위한 최종 성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야기'와 중간 결과물도 등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전 연구 노트를 살펴 보고는 있으나, 그 때에는 꽤 자세하게 서술식으로 기록을 하였지만 이제 와서 다시 이를 참조하여 줄거리를 만들어 보려니 쉽지가 않다. 연구 노트 역시 일종의 날 것으로서 정리가 필요한 자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줄거리가 잘 쓰여지지 않는 답답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할 업무도 많은데 괜한 데 너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KOBIC에 다시 합류하지 않고('다시'라는 표현을 쓴 것은 2013년 2월부터 23개월 동안 여기에서 일한 적이 있기 떄문이다) 예전의 연구조직으로 돌아갔다면 연구 데이터 등록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일에 대한 의미를 찾고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면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옳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사무용 컴퓨터의 폴더를 뒤져 보았다. 혹시 당시에 랩 세미나를 하면서 몇 달 간격으로 업무 진척 상황을 정리한 발표 문서를 발견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렇다! 보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미나 발표용 문서뿐만 아니라 논문과 연구노트 사이를 채울 단계별로 정리된 문서가 사무용 컴퓨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보물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전체 주석화 및 oligo chip 설명 자료와 같이 연구 커뮤니티에 배포하기 위해 만든 소중한 문서가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메일까지 되살릴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웃룩 또는 모질라 썬더버드의 데이터 파일을 주기적으로 백업하여 보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감사나 수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수준으로까지 조사를 하려면, 과거에 이 연구를 하는데 쓴 시간 혹은 그 이상을 지금 다시 들여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그렇게까지 과거에 매몰되어 일을 할 수는 없다.

뒤늦게 찾은 이 문서를 보면서 나 혼자만 연구에 몰두한 것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과학이란 동료 간의 자연스런 교류와 치열한 토론의 결과여야 하는데, 연구노트를 보면 마치 독백을 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를 중간 정리하여 주변에 나누고 다시 피드백을 받은 과정이 남은 다른 문서를 뜻하지 않게 발견하게 되어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런 거 뭐하러 등록해요?'

아직도 이런 비판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새롭게 등장한 분석 장비나 기술(특히 인공지능)을 잘 받아들여서 발전과 혁신을 잘 이룬 연구자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이들로부터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아직 나는 이를 반박할 누를 완벽한 논리를 개발하거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나 자신을 무장하지 못하였다. 사이드 뷰 미러나 백미러만를 보면서 차를 앞으로 가도록 운전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마주쳤다가 뒤로 지나가 버린 위험한 찰나를 백미러로 주시하면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는지, 만약 그러했다면 그 직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 앞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값진 참고 사항을 얻을 수 있다.

즉 과학적 혁신은 개별 아이디어에 익숙하고 다른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후속 세대 과학자들에 의해 일어난다는 말이다. 

1946년 이후 발표된 의생명과학 분야의 논문을 분석해 보니, 실제 젊은 과학자들이 훨씬 더 혁신적인 주제를 연구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여기서 젊음의 기준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연구에 종사해 온 경력 나이(career age)를 말한다. 경력이 쌓일수록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반한 연구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줄어든다는 분석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고, 젊은 과학자 입장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과학자와의 협업이 중요하다.

이상은 <과학하는 마음> 115~116쪽에 있는 내용을 일부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 데이터라는 건조한 용어를 쓰는 대신 경험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하면 된다. 7월엔에는 대장균 B와 W strain의 연구 경험을 문서로 정리하여 등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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