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0일 수요일

딸아이의 출국날

자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정을 겪게 되지만, 오늘과 같이 복잡하고도 서글픈 느낌은 처음이다. 딸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집을 떠났을 때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 준다는 핑계로 별로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주말에 두 시간 정도 운전을 하여 딸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 2022년 8월부터 매우 최근인 1월말까지 서울 소재의 정부 조직에서 파견 근무를 하게 되어 광화문 근처에 방을 얻어 살면서 수시로 왕래가 가능하였다. 

그랬던 딸아이가 오늘 아침 뉴욕으로 떠났다. 연말부터 열심히 해외 취업 기회를 알아보더니 무난히 면접을 통과하고, 비자를 받아서 맨해튼에 위치한 작은 회사의 보조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자 신청을 위한 서류 작업이 지연되는 바람에 졸업식을 할 때까지도 출국을 정말 할 수 있는 것인지 불확실한 상태로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비자 인터뷰 날짜가 잡히고 그 후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항공권을 예약하고 숙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딸이나 나나 살갑게 마음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명절이 되어도 부모를 보러 대전 집에 오기보다는 자취방에서 있는 것을 더 좋아했고 때로는 전화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만큼 독립심이 강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혼자 감내하면서 해결책을 찾는 아이였다. 아내는 딸아이가 출국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로서 자식을 걱정하면서 안전하게 잘 지내라는 당부의 말도 별로(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같이 지내는 지난 삼주일 동안 아내는 가져갈 짐을 챙기고 미국에 가면 맛보지 못할 음식을 해 주느라 불편한 몸으로 애를 썼지만, 정작 나는 그 과정을 별로 도와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왜 몸도 아프면서 그렇게까지 해 주어야 하느냐고 핀잔을 주고는 하였다. 아내도 작년부터 회전근개에 손상이 오면서 염증까지 생겨서 매우 심한 통증으로 팔을 잘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출국날이 되어 딸아이의 배웅을 위하 가족과 함께 공항으로 가니 덤덤했던 마음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조심하라는 짧은 당부의 말을 하고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출국장으로 가라는 말을 하면서 딸을 한번 안아주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직장인이 되어 휴가를 내고 배웅을 나온 아들도 눈시울이 벌겋게 되었다. 아는 사람도, 마중 나올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뉴욕으로 가기 위하여 혼자 출국장으로 나서는 모습이 왜 이렇게 안쓰럽던지... 작은 몸집에 감당하기 버겁도록 무거운 가방을 몇 개나 끌고 숙소까지는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위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곳에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 보겠다고 당차게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해 왔겠지만 막상 출국날이 되니 긴장과 걱정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딸아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딸아이를 보내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딸의 앞에는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까?

비행기 탑승 전 연락을 해 보니 보안검색대에 기내 휴대용 가방을 밀어 넣고는 그대로 출국심사를 통과하는 바람에 다시 가방을 찾아 오느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혼자 출국하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도 했을 것이고 면세구역에서 미리 예약한 USIM 칩을 수령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가 그렇게 된 것이리라. 혼자 나가는 것이 슬프다면서 딸아이 역시 울고 있었다.

대전으로 돌아와서 딸아이가 두고 간 물건을 보니 또 다시 감정이 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한동안은 다음을 추스리기 위해 애를 써야 될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성장의 과정이요 당연히 치러야 하는 아픔이다. 자식에게도, 그리고 부모에게도. 당장은 서운하지만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될 아픔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딸이 어느새 자기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세상을 향해 첫 발자국을 내딛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앞으로 잘 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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