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3일 일요일

문학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의 제목에서 '문학'을 '도서'나 '출판 산업'으로 바꾸어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자리를 대신할 문화적 대체제가 요즘은 많이 늘어났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러하다. 휴대폰 속 세상에서 도파민을 뿜어내게 만드는 짧은 영상도 마찬가지이다.

앙투완 콩파뇽『문학의 쓸모』


대부분의 인간 활동은 서사적·시적 차원을 지닐 수 밖에 없다(212쪽)....서사적·시적 능력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수행 능력을 향상해준다는... 독서가 빗장이니 그들에게 책을 읽히고, 이야기 예술의 보편성을, 그 편재성을 깨우쳐주자. 셈만 알고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면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설득할 수 없으니 말이다(213쪽).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인간은 언어를 발명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또 이것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것이 종교나 이데올로기로 형상화되기도 했으나, 쉽게 표현하자면 핵심은 바로 '이야기'이다. 길게 이어지면 소설이 되고, 운율을 갖추면 시가 된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이상, 문학이 사라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아쉽지만 문학은 창작자에게 살아있는 동안 직접적인 경제적 풍요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후에나 작품이 재평가가 되어 수십년, 아니 백년이 넘도록 지속해서 읽히고 팔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별로 아쉬울 것은 없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이 매년 꾸준히 나오지는 않겠지만, 늘 즐겁게 읽을 거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사회 전체 모든 분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통계학이 모든 학문에서 도구가 되고 있듯이. 문학으로 접근하는 첫 번째 진입 장벽은 끈기 있게 책을 읽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휴대폰을 통해 소비되는 숏폼 영상이 독서에 대한 장벽을 쌓는다.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가? 요즘 들어서 두 주마다 규칙적으로 도서관을 들락거리기는 하지만, 문학 서적은 거의 빌리지 않는다. 가급적 소설책 한 권을 꼭 끼워 넣으려고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는다. 특히 배경 지식이 많이 필요한 국외 소설은 더욱 그러하다. 고전 소설부터 도전해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청소년 시절에 책을 별로 읽지 않았다는 부끄러운 고백이다.

『문학의 쓸모』는 조치원1927아트센터(인스타그램)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 <헤이다>에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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