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어제, 4/30) 아내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이번 행사 기간은 4월 28일부터 5월 7일까지. 전주를 꽤 자주 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올해는 1월 29일에 이어서 이제 겨우 두 번째. 아마도 어린이날에 한번 더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체 217편의 초청 영화 중 온라인 관람(링크)이 가능한 영화(해외 69편, 국내 43편)도 있으니 몇 편을 꼼꼼하게 골라서 이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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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돔 앞에서 |
젊은이들로 가득한 영화의 거리와 객사길을 거닐면서 이제 정말로 우리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 보았다. 한옥거리보다는 이쪽 거리가 조금 더 한산하고 식당이나 카페도 가성비가 높은 것 같다. 물론 한옥거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동안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져서 버스킹을 진행하는 연주자들은 음악 중간마다 핫팩을 매만지며 손을 덥혀야 했다. 클래식 연주자로 구성된 팀이 영화 음악 주제가 메들리를 들려 주었다.
출품된 작품을 골라서 관람하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이번에도 조이앤시네마에서 영화제와는 상관이 없는 최근 개봉작인 「앵커」를 보았다. 이혜영 배우의 면도칼 같은 정확한 대사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면서 왜 이렇게 빛나는 배우를 한동안 잊고 있었나(나만 그랬는지도)하는 생각을 했다. 안성기와 함께 출연했던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를 직접 극장에서 본 일이 있다. 실은 이 영화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 검색을 해서 찾아냈는데, 1988년에 개봉한 영화이니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이다.
봉준호 감독이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면서 '1인치에 불과한 자막의 장벽을 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영화팬들의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물론 옳은 말이지만, 어두운 극장에서 직접 화면에 몰입하면서 모국어로 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 영화는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차라리 한글 자막을 깔아 주면 좋겠다는 푸념까지 종종 보게 되는데,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것은 영화 제작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촬영 현장의 위계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마이크를 든 사람이 카메라를 돌리는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정확할까? 녹음을 잘 하려면 마이크를 배우 가까이 들이대야 하는데, 잘못하여 화면에 나오면 곤란하니 촬영 현장에서는 '입김이 더 센' 촬영감독을 불편하지 않게 녹음을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오디오는 촬영이 끝난 뒤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극단적인 경우 후시녹음이라는 것도 있으니) 벌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되었다고 본다.
AI에 의한 번역 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웹에 올라오는 외국어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OTT를 통해서 우리말 더빙이나 자막이 입혀진 영화를 보는 것도 매우 흔한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옮겨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애플 TV에서 「파친코」를 보면서 몇몇 배우의 우리말 대사가 매우 어색하다고 느꼈다. 영어로 된 원작 소설을 국문으로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억양과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한국어 자막이 입혀진 외국 영화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자. 실제 그 배우의 발음이 언어 현실에 맞는지 아닌지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자막 또는 번역이 새로운 세계의 문화를 접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하지만, 그것으로 옮겨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 허전함은 모국어로 만들어진 영화를 볼 때에만 비로소 채워지는 것.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일본 만화영화 「겁쟁이 페달」(조선일보 기사 링크)을 보면서 다른 언어를 제대로 옮긴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 저지(jersey, 여기에서는 소속 고등학교가 새겨진 로드 자전거 팀용 상의)를 골에 전달해야만 해!"
소속 팀이 이길 수 있도록 가장 빨리 달려서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자는 뜻인데, '저지를 전달한다'고 표현한 것을 그대로 직역을 해 놓아서 매우 어색했다. 번역가의 고충이 느껴진다.
「앵커」는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아무런 사전 정보를 갖지 않고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꽤 쏠쏠하다. 반전이 숨어있는 영화라서 줄거리를 소개할 수는 없다.
전주돔 곁의 야외 행사장을 둘러보다가 한국형 영화 효과음원 사업(K-Sound Library, 링크)의 부스에서 영상에 효과음을 직접 만들어 넣는 이색적인 체험을 하였다. 내가 고른 것은 사막에서 야영을 하면서 면도를 하기 위해 가죽에 면도날을 가는 소리였다.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인지도 알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물론 이에 해당하는 실물은 없으므로 두꺼운 종이에 헤라를 문지르는 방식으로 영상에 맞추어 소리를 내면, 부스에 설치된 다이나믹 마이크로 소리를 녹음하여 영상에 입혀서 보여주는 체험이었다. 몇 초에 불과한 간단한 체험이었으나, 소니 MDR-7506 모니터링용 헤드폰을 통한 깨끗한 소리 재생은 싸구려 헤드폰 또는 헤드셋만 사용하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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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MDR-7506. 단종되었지만 아직도 신품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후속 모델은 뭔가? |
정작 영화제 자체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고 전부 '소리'에 대한 내용으로 오늘의 글을 채우게 되었다. 아직 방향을 잡고 있지 못하는 나의 사운드 창작 및 녹음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많이 얻게 된 짧은 여행이었다.
대성동 주차장으로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골목길을 걸으며 마주친 어떤 젊은 여성을 보고 나와 아내가 똑같이 생각한 것이 있다. 물론 전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와, 「미도스지」(겁쟁이 페달 참조)를 꼭 닮았네!
전주 조이앤시네마여, 영원하라!
2022년 5월 9일 업데이트
어버이날을 우리와 같이 보내기 위해 고양시에서 내려온 아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전주국제영화제 마지막날에 다시 전주를 찾았다. 영화제 기간에 출품작을 하나라도 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대충 시간에 맞추어
제임스 베닝(James Benning)이라는 미국 감독의 영화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링크)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아무런 등장인물이나 자막도 없이 미국의 각 주를 고정된 각도에서 약 2분씩 보여주는 그의 영화는 지나치게 심심하였다. 소위 상업적인 대중문화예술업체에서 일하는 아들의 불평도 수긍이 갔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평론가에 의하면 '시청각적 폭격')에 물든 우리들에게 때로는 이런 영상은 치료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