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영 옮김. '빅 브러더'는 첫 쪽부터 등장한다. |
1984년에 태어난 사람은 벌써 30대 중반이 된 2019년 10월을 살고 있는 지금, 아직 우리는 빅 브러더와 같은 무지막지한 국가 권력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텔레스크린이 아니더라도 치안을 위한다는 이유로 어디에나 CCTV가 설치되어 있고, 비록 그것을 강제하지는 않으나 개인이 인터넷에 남기는 정보를 이용하여 언제든지 신상이 털릴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정보의 독점은 국가가 아니라 기술을 갖춘 기업 - 한때는 혁신의 상징이었고 모든 이가 그곳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 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넘쳐나는 정보는 사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윈스턴의 직업은 바로 당의 지령에 맞추어 과거의 신문 등 기록을 고치는 일 아니던가.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가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화를 가져다 준 시기라고 당에서 정의를 새로 내리기로 한다면 과거의 기록을 찾아내어 핍박과 탄압을 받았던 흔적을 지우고 새 기사를 넣어서 다시 배포하는 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면 곧 과거를 지배하는 것이고, 과거를 지배하는 것은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한때 이 책은 반공주의를 고무하려는 '국가 권력'에 의해서 널리 읽히기를 권장받기도 했었다. 사실 그것은 옳지 않다. 조지 오웰은 투철한 민주사회주의자였고 이 책을 통해 비판하려는 것은 전체주의였다. 전체주의는 어떠한 정치 체제의 틀을 쓰고도 올 수 있으니 말이다.
전쟁은 평화/자유는 예속/무지는 힘
War is peace / Freedom is slavery / Ignorance is strength2 + 2 = 5라는 말도 안되는 명제를 사실로 믿게 만들고 급기야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힘이 아직도 작동 중인 나라가 몇 군데 있는 것 같다. 이보다 조금 더 고급스런 전략을 구사하는 곳에서는 대중이 원한다는 이유로 그냥 놔 두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에 바쁘다. 새로운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 지식을 나누려는 욕구, 고도의 정치적 의도를 깔고 만들어진 허위 사실을 퍼 나르려는 것... 클릭 회수가 올라갈수록 누군가는 돈을 번다. 문턱을 지키고 앉은 플랫폼 기업이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는 셈이다.
조지 오웰의 시대에는 기업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마트폰을 거부하고 아직까지 고집스레 피처폰을 쓰는 사람들(심지어 극소수지만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은 우리 주변의 윈스턴인지도 모른다.
밑바닥부터 사회 생활을 경험한 조지 오웰이 남긴 다른 작품들을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는 19세 때부터 미얀마에서 5년 동안 경찰 생활을 하다가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대한 회의를 품고 돌아오기도 했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영어 개인교사와 접시닦이 일을 했으며, 런던에서는 부랑자들과 어울려 룸펜 생활을 한 바 있고,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갔다가 무정부주의 시민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심지어 2차대전이 발발하자 입대를 원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당하자 민방위 부대에 자원하여 들어가서 군수공장에서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결국은 1945년 종군기자로 유럽 전선으로 가서 나치스 독일의 붕괴를 목격하였다.
바로 그때 무장한 간수가 뒤에서 나타났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바로 그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그는 빅 브러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저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는 데 40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아,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아,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고집부리며 스스로 택한 유형이여! 술 냄새나는 눈물이 코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는 빅 브러더를 사랑하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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