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의사를 직접 만나지 않고 전화나 화상(앱) 등을 이용하여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비대면 진료(또는 비대면 의료)라고 한다. 오늘의 글에서는 의료와 진료를 동일한 의미라 간주하고 글을 쓰겠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에 쓴 글 '의료와 진료는 무엇이 다른가? 보건은?을 참고하자.
비대면 진료라는 행위에 대하여 모두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정의가 내려진 것은 아니다. 실은 원격진료(telemedicine)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Telemedicine은 의료 서비스 공급자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다른 의료인 또는 환자에게 비대면 또는 온라인 대면 방식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원격진료는 환자가 병원을 직접 가지 않고 진찰 및 처방을 받는 행위(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바로 그것)를 포함한 더 큰 범위를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법에서 허용하는 것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먼 곳에 있는 의료인에게 의료지식이나 기술을 지원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이는 한국의 상황을 반영한 매우 좁은 정의로서, 자문이나 판독 등으로 제한된다. 여기에 환자와 의료인 사이의 원격의료를 본격 허용하려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원격의료(환자-의료인)에 대한 시민사회 등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지난 정부에서 대신 비대면 진료라는 용어를 쓰기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즉, 기술 발달에 의해서 충분히 가능하고 활발히 논의되고 있으며 포괄적인 원격진료보다는 한 레벨이 낮다는(따라서 그만큼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주기 위하여 억지로 만든 말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원격진료 ⊃ 비대면 진료 (?)
원격진료를 전면적으로 허용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므로, 그 범위를 줄인 것을 비대면진료(untact medicine)라고 정의하고 - 범위가 줄어들게 되고 이에 따라 반대할 명분이 줄어들 것이니 - 앞으로 공식적으로는 이 용어를 쓰자는 것인데, 여러모로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untact'라는 낱말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세계적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코로나-19가 세상을 괴롭히던 시절에는 국내에서 비대면 진료가 한시적으로 허용되었었다. 사실 비대면 진료는 현행 의료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료법 제3장(의료기관) 제1절(의료기관의 개설)을 찾아보자.
①의료인은 이 법에 따른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아니하고는 의료업을 할 수 없으며,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외에는 그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여야 한다.
모든 의료행위는 의료기관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감염병 위기상황에서는 환자가 직접 병원에 오기에는 상태가 위중한 경우가 많고 격리 의무를 준수해야 하므로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했었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의 IT 기반을 활용한 많은 비대면 진료 플랫폼 기업이 생겨나서 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다가 코로나-19 감염병 위기상황이 종료됨에 따라 한시적으로 허용했던 비대면 진료를 원상태로 되돌리는(즉, 불허) 것을 논의할 때가 되고 말았다. 이미 비대면 진료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고, 의료 소비자에게 많은 편리함을 주었으니 현행 의료법을 어떻게 해서든 손질해서 기왕 시작한 비대면 진료의 편리함을 계속 이어나가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비대면 진료 허용 조건을 놓고 도대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비대면 진료라면 처방된 약을 배달받는 것이 상식적인데, 의약품 배송 문제는 반대가 더 심해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진료는 대면을 원칙으로 해야 하고, 비대면 진료는 대면 진료를 보조하는 것으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허용하자는 것이 의료계의 의견이다. 따라서 의사가 없는 산간 도서지역의 환자, 재진 환자 등만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진과 재진을 도대체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갑자기 몸이 아픈데 근무 중에는 병원을 직접 찾아가기 어려운 여건이라 비대면 진료를 이용하려는 것인데, 현재 허용된 기준에 따라 재진만 가능하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의사도 비대면 진료에서 환자 본인을 확인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낀다('의사가 비대면진료 꺼리는 이유 "법적 책임 소재 불분명"' 기사 참조). 비대면 진료를 신청한 환자가 초진인지 혹은 재진인지를 미리 확인하는 것도 병원측에 부담이 된다. 게다가 처방전을 온라인으로 받았다 하더라도, 약을 사려면 직접 약국에 가야만 한다. 현재의 방식은 모두에게 불편함에는 틀림이 없다.
3개월 간의 계도기간이 끝나고 9월 1일부터 비대면 진료가 본격 시범사업으로 전환되었다(보건복지부 공고 링크). 그러나 현장에서는 계속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의료법 개정은 꿈과 같은 소리. 바로 어제(9월 14일),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행성을 달리고 있다.
[청년의사] 비대면 진료 공청회 열었지만 '찬반' 여전...사회적 합의 난항(2023년 9월 15일 기사 링크)
의료계와 정부는 과거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비대면 진료의 4대 원칙'에 합의한 일이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면 진료 원칙, 비대면 진료는 보조 수단
- 재진 중심
- 의원의 의료기관만 허용
- 비대면 진료 전담 의료기관 금지
의료 남용 문제, 의료사고 또는 과오 발생 시 책임 소재 문제 등도 비대면 진료를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늘 하는 말이다. 비대면 진료를 통해 처방받은 의약품 중 비급여가 57.2%이고, 그중에서 사후피임약 처방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조선일보 기사 링크)도 몹시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다. 오남용의 소지가 있고, 충분한 의료 서비스가 전달되기 어려우므로 국민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면 진료 환경에서도 의사를 만나 단 5분도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를 충분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들은 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저수가 체계에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환자를 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전문가인 약사가 제공하는 '복약지도'는 또 어떠한가? 현실의 복약지도는 '5분 진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어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뉴스를 보았다. 60대의 요양원 입소자가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 대학병원으로 옮겨 수술까지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필수로 투약해야 하는 심장약, 고혈압약 및 비뇨기과 약이 5개월이나 빠져 있었다는 것. 여러 요양원을 순회 방문하는 의사가 실수로 처방을 누락했음이 밝혀졌는데, 요양원과 의사는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다. (JTBC 뉴스 링크). 대면으로 진료를 하면 실수가 적고, 비대면은 더 잦을까?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의료 서비스가 전달되는 방식 차제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의료계에서는 국민의 안전을 늘 내세우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비대면 진료를 통해 내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 수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아닌가? 입장을 바꾸어 보면 비대면 진료를 통하면 내 병원에 직접 찾아오지 못하는 환자를 끌어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경향신문에 실린 김윤 서울대 교수의 글('환자를 위한 비대면 진료는 없다' 링크)를 인용해 본다.
의사·약사·병원, 플랫폼 업체 모두 겉으로는 환자와 국민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비대면 진료가 필요한 환자와 국민은 뒷전이었다. (중략) 왜 정책을 결정할 때 환자와 국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익단체의 '밥그릇 싸움'만 난무하게 될까? 정부와 국회를 포함한 정책결정자들이 이익집단의 '포로'가 돼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의 인식 수준을 보자. 심지어 비대면 진료를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와서 의료법 개정은 더욱 멀어진 일이 되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이번 정부의 돌연한 출연연구소 R&D 예산 삭감 횡포를 저지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데일리팜] "복지부 나빠요"...비대면 진료 반대한 의원들 발언 보니(2023년 3월 27일)
- [메디게이트 뉴스] 약사 출신 민주당 전혜숙 의원 원천 반대로 '비대면진료 법제화' 논의 무산(2023년 8월 24일)
어제 공청회에서 한국원격의료학회 실무위원장인 신애선 서울대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한다.
기술발달로 병원에서 진료가 이뤄지는 시대는 끝났다. 재택의료, 원격모니터링, 디지털치료제 등의로 논의 주제를 넓혀야 한다.
기술발달은 막을 수 없다. OECD 국가 중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 뿐이다. 다른 분야로 가 볼까? 지능형로봇법 개정을 통해 이제 조금만 지나면 배달 로봇이 보행자의 지위를 얻어서 따뜻한 음식을 싣고 주문자 집 앞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식당은 배달은 절대 안해. 손님은 반드시 매장으로 와서 음식을 먹여야 해! 아니, 플랫폼을 이용한 배달 자체를 금지해야 돼!'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업주와 무엇이 다른가? 일회용 음식 포장재가 환경 오염 문제를 일으키므로 음식 배달 문화를 아예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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