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서 '동의서'를 작성할 일이 매우 많아졌다. 서면 동의서에 체크를 하고 서명을 하는 일도 있고, 휴대폰 앱에서 손가락을 놀려서 동의를 하기도 한다. 연 단위로 자동차 보험을 계약하려면 전화기를 붙들고 담당 직원이 줄줄 읊는 내용을 거의 10분이 넘게 듣고나서(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차피 영혼은 약간 가출한 상태...) 동의함을 구두로 표현할 때도 있다. 병원에서 진단 또는 치료에 필요한 검사를 할 때에도 이 검사의 필요성과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동의하는 절차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냥 서면 동의서를 내밀면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고 기계적으로 확인 서명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요즘은 이를 일일이 읽어주어야 한다고 들었다.
'동의하다'라는 낱말을 중학교 1학년 필수 영단어 수준으로 생각하면 'agree'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책임과 의무가 수반되는 계약행위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런데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 동의서는 '계약서'는 아니다. 바로 위에서 기술한 행위(행위인가 의사표시인가? 아, 어렵다...)를 영어로 정확히 옮기면 'consent'가 된다.
Agree와 consent는 무엇이 다른가? 구글을 찾아 보았다. Agree는 일반적으로 어떤 의무가 수반되는 반면, consent는 찬성을 표시하는 의사 표현이라는 점이 다르다.
Agree to do something is a legal or constractual context is generally used to assume an obligation. Consent, on the other hand, is an acknowledgement that the other person will do something and the subject will tolerate it. 출처
'동의란 어떤 자의 행위를 제3자가 찬성하는 표시 또는 그 표시를 요소로 하는 단독행위이다.' 강태성, 민법에서의 「승인·승낙·동의·허락·추인」에 대한 검토 및 개정안」, 민사법의 이론과 실무 (2016) 제19권 제3호 1-56쪽 링크.
강태성 교수의 논문은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96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현행민법이 적지 않은 수준에서 만주국민법(만주국은 너무나 유명한 괴뢰국 아니었던가!)과 일본민법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은 당연하지 않은가? 정부에서는 2015년에 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지만 일부만 통과되었고 나머지는 국회 종료에 따라 자동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승인·승낙·동의·허락·추인은 전혀 개정되지 않았고, 현행 민법에서 이들 용어가 적확한지에 대해서도 거의 논의가 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 논문은 민법에 관한 것이다. 동의라는 낱말이 의료법에는 21회, 개인정보 보호법에는 79회, 생명윤리법에는 80회 나온다. 그만큼 중요하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헌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이로부터 파생된 '무슨무슨 자기결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동의서에 파묻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 다루는 동의는 찬성 또는 허락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러나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 동의서'를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 허락서'라고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자는 것이다. 강태성 교수의 논문에서도 민법 내에서 쓰이는 승인, 허락 등의 용어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동의로 바꾸자고 하였다.
오늘 곁다리로 알게 된 지식: 청약(offer)과 승낙(acceptance)이 합치할 때 계약이 성립한다.
하나 더: 헌법재판소는 자기결정권의 근거를 헌법 제10조('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자기결정권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1990.9.10. 89헌마82(링크)인데...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자기결정권에는 성적행동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간통죄라는 협박적 법률을 두어 애정이 없는 경우에도 혼인관계의 지속을 강제하는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하여 국가가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한 헌법 제10조와 신체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제12조에 위반되고...
어이쿠, 이건 형법 제241조의 위헌 여부를 다루었던 사건(들)의 시발점이 아닌가? 이제는 삭제된 형법 제241조는 배우자 있는 간통행위 및 그와의 상간행위를 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었다. 무슨 고결한 사건을 다룬 판례에서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구체화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시각에 따라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겠지만. '○○○ 자기결정권'이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선언한 헌법재판소 선고문에서 ○○○ = '성적(性的)'이었다니... 그러나 정작 1990.9.10. 89헌마82의 주문은 '형법 제241조는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였다. 이 법률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론을 내린 위헌소원은 내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훨씬 나중에 나왔다. 지금 해당 조를 찾아보면 '2016.1.6. 법률 제13719호에 의하여 2015.2.26.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된 이 조를 삭제함'이라고만 나온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에 근거하여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을 도출한 것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링크).
하나 더: '...필자는 구체적인 조문의 예시를 통해 우리 민법이 만주민법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입법되었음을 논증하고 결론적으로 만주민법을 우리의 계수사(繼受史; 계수는 '전해 받음' 또는 '외국의 법을 채용함'의 뜻을 갖는다)에 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밝히고자 한다' 이철송, 「만주국민법의 우리 법제사적 의의 - 만주민법의 자리매김에 관한 의문 -」 민사법학(2017) 제78권,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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