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7일 토요일

독서 기록 - 리처드 피셔의 롱 뷰

DNA 이중나선이 품고 있는 암호를 해독하면서 인류는 생명의 신비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여기고 새로운 지식을 밝혀 나가는 과정에 열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결론은 어떠한가? 유전자가 생명 현상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심각한 편견이며, 넌코딩 영역이라고 불리던 곳(실제로 인간 유전체에서는 압도적인 영역을 차지함)의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혈액 줄기세포를 이용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우주에서 세포는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져 너무 빨리 늙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평소에는 휴면 상태에 있던 영역(넌코딩 영역을 포함하는 '다크 게놈')까지 깨어나 들썩이기 시작하여 노화 가정을 더욱 가속했다고 한다.

코딩 영역과 그 주변부의 '뉴클레오티드 캐릭터 시퀀스'를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징검다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겨우 건너게 되었다고 해서 큰 개울의 전체를 파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딩 영역은 물론이요 넌코딩 영역의 기능을 다 알게 되었다고 해서, 유전체가 모든 것을 전부 결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하다. 유전자(넌코딩, 다크 게놈 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생각해도 좋다)가 어떤 형태로 발현되어 개체의 특성을 나타내도록 만드는 과정을 크게 지배하는 것은 결국 외부 요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유전체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미리 낙담하지 말자. 이것이 오늘의 이중나선 선생님이 남기는 한 마디이다. 

롱 디엔에이? 이중나先生(이중나선생)의 오늘의 말씀.

'모든 것은 (유전자에) 다 결정되어 있다' 또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좁은 사고의 틀에 가두게 된다. 특히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든가 몇 년 뒤에 선출에 의해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구성원들(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아야 할 환경을 포함)을 희생하여 최적의 현재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든다.

리처드 피셔의 『롱 뷰』(원제: The Long View)는 이러한 단기적 사고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면서 장기적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후 변화나 환경, 지속 가능성 문제 등은 특정 당이나 대통령이 집권을 하는 몇 년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감히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고 짧은 안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늘 우선 순위에서는 밀리거나 임기 다음으로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트럼프는 기후위기가 사기라고 떠들고 다니겠는가. 현재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일자리가 유지되고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주기의 단기 인센티브가 주는 문제점이다.

최근 읽은 책. 『경험의 멸종』과 『소니 턴어라운드 』는 9월 21일에 독서 기록을 남겼다.

'미래 세대가 우리에게 해 준게 뭐가 있지요? 왜 우리가 그들을 생각해야 되나요?'라고 물어서는 전혀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본문 394쪽에 소개한 어느 무명씨의 말, '노인들이 그 그늘에 앉아 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무를 심을 때, 그 사회는 위대해진다'라는 말은 독자의 마음 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305쪽의 그림.

이 책의 1부에서는 단기적 사고의 폐해(자본주의 및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 2부에서는 단기적 사고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시간 인식 방식, 그리고 3부에서는 장기적 관점을 키우기 위해 시간 인식을 확대하는 실질절 방법을 다루고 있다. 특히 2장에서는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나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사람 무리, 그리고 언어·문화적 배경이 다른 인류 집단에서 단기적인 시간 인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장기적 사고를 갖도록 돕는 일에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 동참하거나 전통 또는 종교적 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평생 쌓아 온 일에 의해서 사후에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물론 나는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행동을 하도록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나는 이에 더해서 지구 및 생명의 탄생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자연사적인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라는 오만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장기적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 보자. 

  •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는 제도를 통해 20년 주기로 새로운 신을 건설하는 일본의 전통
  • 옥스퍼드 올 소울즈 칼리지에서 100년에 한 번씩 거행된다는 청둥오리 예식(The Marching of Lord Mallard)
  • 조각가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가 직접 스물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만든 Ash Dome
  •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서 나무로 만든 바위를 시냇물에 밀어 넣은 뒤 35년 동안 기록한 <나무 바위(Wooden Boulder)>
  • 천년 동안 연주되는 음악 <Longplayer>
  • 1996년에 시작된 500년짜리 프로젝트인 Bogmir Ecker의 Tropfsteinmachine
  • 기원전 1천년에 시작되어 지금은 시민 참여 프로젝트가 된 <어핑턴의 백마>
  • 만년 뒤를 겨냥한 <롱 나우 파운데이션> 등
일본의 신궁과 같이 완성된 형태이면서 계속 재생성되는 것도 있고 아예 먼 미래에 완성되기를 기대하면서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는 초장기 프로젝트도 있다. 책에서 소개한 이러한 작품(활동?)을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보면서 마치 미술관 또는 박물관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당장 느끼는 나의 괴로움은 장기적 목표 앞에서 수그러든다. 500년 뒤에 최종본을 만든다는 그 일을 왜 하는지, 목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지금 독서 기록을 쓰면서 돌이켜 보니 꽤 두꺼운 책을 너무 빨리 읽어 버린 것 같다. 미술관을 천천히 거닐듯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나무 바위>는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다. <애시 돔>처럼 이 나무 바위 이야기는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고 하더라도 미래는 좌절을 안겨줄 것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무 바위는 또다른 중요한 것을 말한다. 모두가 강을 헤치고 넓은 바다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사라짐과 망각이 결국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0-381쪽)

이는 내시가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원문은 위에서 소개한 <나무 바위>의 링크를 클릭해 보기 바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던져진 화두인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PBS)의 폐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국책연 임무 vs 연구자 역할" PBS 폐지 이후 '출연연' 두고 현장 난상토론, 대덕넷 2025년 9월 25일).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서 경제 성장을 주도해야 한다는 시급함에 장기적 관점이 들어갈 틈은 별로 없다. 아주 개인적인 관점이자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이라는 한 낱말이 주도적으로 쓰이면서 정책이나 정치적 함의를 담게 된 것은 매우 불편하다. 

이 토론회 기사를 보면 저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각각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PBS에 길들여진 우리 출연연 연구자들은, 경쟁을 통하여 수주해야 하는 과제와 무관하게 인건비를 보장받는 것은 '노는 것과 같다'라는 편협한 사고의 희생자가 된 것 같다. PBS 폐지의 핵심은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주겠다는 현격한 처우 개선인가? 혹은 현재의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바람직하든 아니든 일단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어느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질 것 별로 없을걸요?' 제목과 목표가 제시되고, 구체적인 방법은 일정에 쫒겨 얼기설기 만들어지며, 이를 추진하기 위한 미끼가 되는 단기성 인센티브만 나열된다. 그리고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으나 통제와 관리라는 방식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어서 온갖 억측만 난무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PBS 제도의 폐지가 이루어질 전환기를 위해 마련되고 있다고 알려진 새로운 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의 글도 여러 주제를 널뛰기하고 있다. 글 작성의 주요 목적은 독서 기록이었고, 오늘 도서관에 이를 반납하고 나서도 별도로 구입하여 소장하여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몇 안되는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인류세'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떤 장기적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PBS 폐지라는 당장의 숙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인류세의 존속이라고 해서 현 지구의 모든 자원과 미래 세대까지 갈아 넣어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원 투입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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