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6일 월요일

세로 화면의 영상에 익숙해지기

휴대폰을 이용하여 세로 포맷으로 찍은 동영상은 아마추어의 전유물인가?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름 시절, 나는 얼마나 많은 포트레이트 구도의 인물 사진을 찍었던가. 요즘 휴대폰으로 찍은 짧은 동영상을 편집하여 유튜브 쇼츠(Shorts)로 올리는 연습을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기로 하였다. 

먼저 기술적인 사항. 쇼츠 포맷은 9:16의 세로 비율에 최대 3분 길이이며, 권장 해상도는 1080x1920(FHD)로서 모바일 환경에서 시청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유튜브 앱에서 쇼츠 작업을 하려면 별도로 준비한 오디오를 쓰기가 어렵다. 촬영한 영상에 녹음된 것을 그대로 쓰거나, 또는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음원만을 써야 하는 것 같다. 오디오를 별도로 입히려면 내가 쓸 줄 아는 편집기는 Open Shot Video Editor이 유일한데, 여기에서 세로 영상을 편집하려면 약간 번잡하다. 편집작업 후 세로 영상으로 내보내기를 위한 별도의 프로파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Reddit의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링크). 가로로 촬영한 영상을 세로 포맷으로 만들려면 약간의 수고를 더 거쳐야 하는 것 같다. 어찌되었든 쇼츠를 만들기 위해 장비나 편집용 소프트웨어에 크게 투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다 할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삼성 갤럭시 S23을 쓰고 있는데, 동영상 촬영 시 상당한 수준의 안정화 기술이 적용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한 손으로 휴대폰을 편하게 잡고 촬영을 하려면 짐벌 정도는 있으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상미학 및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브런치에 오른 구재모 님의 글 세로 화면 비율에 대한 이론적 고찰(1편, 2편)을 챗GPT로 요약하여 보았다. 세로 화면 증후군(Vertical Video Syndrome, VVS)라는 신조어는 세로로 찍은 (동)영상에 대한 비판 또는 조롱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참고문헌을 포함한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오늘날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환경에서 영상의 세로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같은 숏폼 플랫폼은 모두 세로 화면비율을 기본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를 넘어 미디어 미학, 시각 경험, 사회문화적 권력 구조까지 재구성하는 현상이다.

기기의 물리적 구조가 세로인 스마트폰은 사용자의 시선과 몸의 방향을 일치시킨다. 사람들은 더 이상 ‘스크린 앞에 앉는’ 대신, 손안의 화면을 통해 세계를 본다. 전통적으로 영화나 TV는 가로 화면비율을 전제로 발전해 왔다. 인간의 양안 시야가 수평 방향으로 넓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되어 왔고, 따라서 가로 비율은 “자연스럽다”는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반면 세로 화면은 오랫동안 ‘비전문적’, ‘아마추어적’, ‘불편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인터넷 초창기에는 ‘세로 영상 증후군(Vertical Video Syndrome, VVS)’이라는 조롱 섞인 용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는 기술적 이유만이 아니라, 기존 영상 산업 종사자들의 권력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오랜 기간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중심으로 영상의 문법과 형식을 규정해 왔고, 새로운 형식인 세로 영상을 ‘비전문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그 경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SNS가 결합된 오늘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누구나 촬영자이자 편집자이며 동시에 배급자가 된다. 세로 화면은 그런 탈권위적, 참여적 미디어 생태계의 상징이 되었다.

미디어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면, 세로 화면은 결코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초상화나 종교화, 사진 초기에 흔히 쓰인 포맷, 그리고 도시의 건축물처럼, 인류의 시각문화 속에는 늘 수직적 이미지가 존재해 왔다. 따라서 세로 영상은 기술적 우연이 아니라 오랜 미학적 전통의 재맥락화라 할 수 있다. 세로 영상은 인물의 정체성, 몸, 공간의 깊이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특히 스마트폰 카메라가 주체의 시선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세로 영상은 ‘자기 기록’이자 ‘행위로서의 영상’이라는 성격을 띤다.

저자는 숏폼 콘텐츠가 20세기 중반 누벨바그(Nouvelle Vague) 영화운동과 닮아 있다고 본다. 당시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은 기존 영화 문법을 깨고, 일상적 장면과 즉흥적 연기를 카메라에 담으며 새로운 미학을 개척했다. 오늘날 숏폼 창작자들도 짧은 시간 안에 개인적 감정이나 상황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기존 서사구조와 시각 규칙을 넘어선다. 촬영자의 손떨림이나 즉흥성은 결점이 아니라 ‘현존의 증거’로 작동한다. 이는 오히려 관습적 완성도를 거부함으로써 더 진솔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응용 미디어 미학(applied media aesthetics) 관점에서도 세로 영상은 새로운 미학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기존의 영화나 방송 미학은 ‘보는 것’을 중심에 두었다면, 스마트폰 영상은 ‘찍는 행위’와 ‘공유의 과정’이 미학의 일부가 된다. 사용자가 화면을 세로로 들고 인물과 마주하며 촬영하는 행위 자체가 서사와 감정의 일부로 편입된다. 즉 세로 영상은 감상보다는 ‘참여의 미디어’다.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가 줄어들면서, 관객은 관찰자가 아니라 대화자가 된다.

이처럼 세로 화면비율은 단순히 기술적 포맷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구조를 바꾸는 사회문화적 사건이다. 전통적인 영화 문법은 인간 중심의 시각과 공간 구성을 전제했지만, 세로 화면은 그 위계를 해체하고 몸, 사물, 공간을 다른 비율로 재배치한다. 저자는 세로 영상이 결코 “가로 규범의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미학적 질서의 징후라고 본다. 세로 영상은 스마트폰 시대의 ‘주체적 시선’을 대표하며, 더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관계적인 이미지 생산의 방식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세로 화면비율을 조롱하거나 임시적 현상으로 보는 관점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세로 영상은 우리의 몸, 감각, 미디어 소비의 습관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진화이며, 앞으로 영상언어의 또 다른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세로 영상의 미학은 전통적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용자 중심의 새로운 시각적 규범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어제 저녁에 연습 삼아 올린 유튜브 쇼츠 동영상이 자고 일어났더니 1.7천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생각보다 높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만든 자작곡을 유튜브에 올려 봐야 1년이 넘도록 수십 회의 조회수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왜 사람들이 쇼츠에 열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쇼츠를 통해서 관심을 끈 뒤 풀 영상으로 연결하는 전략도 많이 활용되는 것 같다. 

이번 글은 두 가지 논쟁적인 주제가 뒤섞여 있다. 가로 영상 대 세로 영상, 긴 영상 대 짧은 영상. 어느 하나는 한동안 주류로 인정되어 왔고, 나머지 하나는 무시되기도 하였으나 새 시대에 떠오르는 경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완전히 밀어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2025년 10월 4일 토요일

걱정의 경제학: 할 만한 걱정은 전체 걱정의 4~5%에 불과하다

구글에서 경제학의 목적을 검색해 보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진시킬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AI 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걱정의 경제학'이라고 한다면, 걱정에 드는 비용과 걱정을 통해 얻는 효용을 비교하여 정말 그 걱정이 필요했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에 의하면 걱정을 하는 일의 약 40%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약 30%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그리고 걱정을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이 자리잡는다. 따라서 실제 걱정을 하여 행동으로 옮기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걱정은 약 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주는 내 생애에서 가장 바빴던 며칠이었던 것 같다. 여러 일정을 소화하면서 과연 무난히 내가 각 장소로 늦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 월요일에는 식약처에서 주최하는 포럼에서 발표 및 토론을 하기 위해 청주(오송) 출장이 있었다. 오전에 부서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대전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마음에 별로 여유가 없었다. 일정을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날 아침 8시에 국립암센터에서 열리는 심의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인체 암조직을 분양신청하였는데, 그 분량이 적지 않기 때문에 과제 책임자가 배석을 하여 입장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전에서 서울행 KTX 첫 차를 타도 고양시에 위치한 국립암센터를 아침 8시 조금 전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미리 서울에 가서 미리 1박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청주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을 먹고 짐을 챙겨서 대전역으로 향했다. 서울역까지 간 뒤 근처의 허름한 숙소에서 묵었다.

다음날(화요일) 아침, 이른 시각에 서울역에서 GTX-A를 타고 대곡역까지 갔다. 여기에서 택시나 버스를 타면 국립암센터까지 갈 수 있다는데, 정작 대곡역에 내리니 택시를 불러도 올 것 같지가 않은 분위기였다. 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3호선을 타고 정발산역까지 간 뒤 약 1.2 km를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그 다음 일정은 오전 10시. 연세봉래빌딩에서 열리는 국가통합바이오빅데이터구축사업 운영위원회에 참석해야 한다. 암센터 심의에 동행하여 실제 발표를 했던 연구 실무자 덕분에 버스를 타고 대곡역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 다시 GTX-A를 타고 서울역까지 온 뒤 걸어서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아침은 근처 편의점에서 초코바 하나와 베지밀로 때웠다.

다음 행선지는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제주). 10시에 시작된 운영위원회는 12시에 끝났지만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단 김포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키오스크에서 발권을 하고 보안검색대로 들어가려는데 탑승권에 인쇄된 이름이 영문이니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면 발권 카운터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한글 이름이 찍힌 것으로 바꿔 오라는 것이다. 국내 여행에 뭔 여권을 소지하겠는가? 아고다에서 국내선 항공권을 예약한 경우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참 나...

저녁 6시가 넘어서 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버스를 타고 ICC 제주 근처에 미리 잡아 둔 숙소로 향했다. 고달픈 이틀째가 이렇게 지났다. 그러나 다음날(수요일)의 일정은 더욱 까다로왔다. 오후에 세션 좌장을 맡았는데 예정된 종료 시간은 4시 50분. 그러나 제주공항으로 가는 5시 3분 출발 600번 버스를 타야만 김포공항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20분 정도이다. 

학회가 열린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원래 학회는 목요일까지 이어지지만, 아무리 늦더라도 수요일 안에 대전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돌아가는 항공권 역시 영문 이름이 찍힌 것이라서 수정을 요청해야 하는데, 김포공항과 제주공항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공연한 걱정이 들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 보았으나 연결이 쉽게 되지 않았고, 채팅으로 문의하니 여행사에 요청하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항공권은 모바일로 발권을 해 놓은 상태였는데, 아고다 고객센터의 채팅으로는 이미 예약이 확정되어 원하는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발표가 늘어져서 5시 3분 버스를 타지 못한다면? 걱정이 되어 발표장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미리 체크해 보기까지 하였다(약 5분 이내). 학회에서 세션이 10분 정도 늘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5시 3분 버스는 타지 못한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출발 시간은 8시였다. 그 다음 버스는 30분 뒤에 출발한다. 그러면 7시 정도에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국내선이니 1시간 전에만 가면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날 기억을 떠올리면 중국인 관광객의 무비자 입국 때문인지 공항에는 제법 사람이 많았고 탑승원 이름 문제로 혹시 실랑이가 벌어지면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차라리 기존의 항공권을 포기하고 1시간 정도 늦은 것을 새로 살 것인가? 제주항공 웹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니 당일 표는 채 2만원이 되지 않는 것이 몇 장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수요일 제주도에서 서울을 거쳐 대전으로 돌아오는 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좌장인 내가 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한 탓도 있지만 마지막 연사가 예상외로 빨리 발표를 끝냈기에 600번 버스를 무난히 시간에 맞추어 탈 수 있었고, 제주공항 발권 카운터에서도 국문 이름이 찍힌 탑승권 재발급을 쉽게 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일에 대한 걱정은 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해결책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연사의 시간 절약은 순전한 행운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나의 문제는 모든 것을 사전에 다 계획해 두려고 하는 것이 가장 크다. 바로 이것이 걱정의 원천이다. 걱정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의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됨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비용이 너무 크다. 그 다음 문제는 현재 어떤 일이 예상대로 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매우 큰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점이다. 미리 하는 쓸데 없는 걱정 + 뜻대로 일이 안 될때 느끼는 스트레스는 누적되었을 경우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떻게는 되겠지'는 매우 현명한 태도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매번 제주도 출장을 갈 때마다 출발 당일에 항공권을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행운은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는 데까지는 계획을 세우되, 너무 지나친 계획은 곤란하다. 플랜 B, 플랜 C... 플랜 Z까지 만들어 둘 필요는 없다.

이번 주의 복잡한 일정 속에서 나는 걱정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투자인지를 새삼 느꼈다. 걱정할 시간에 준비하고, 준비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요즘 배우는 ‘걱정의 경제학’이다.

2025년 9월 29일 월요일

오송역에서는 8번 출구를 잊지 말자

오송역에 내려서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최종 목적지를 가려면 주출입구가 몰려있는 곳이 아닌 반대편 8번 출구로 가야 한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는 철도 건너편에 있다. 철도 위를 가로지르는 통로가 아니면 이쪽에 도달하기 곤란하다.
외부에서 오송역으로 가는 경로. 오송역을 출발지로, 외부를 목적지로 하면 철도 심벌 위에서 방향을 잃기 쉽다.
위에서 끊긴 종착점은 바로 오른쪽에 뚝 떨어진 8번 출구이다. 위성사진 모드로 해야 비로소 출구 번호가 보인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몇번 출구로 나가라고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아서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오늘도 주출입구에 해당하는 곳을 통해 역 바깥으로 나갔다가 건널 수 없는 철도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였다.

걸어서 원하는 곳으로 가려면 긴 통로를 지나 8번 출구로! 잊지 말자.
열차를 내린 후 8번 출구로 나가는 길.
외부에서 8번 출구로 들어가는 계단 길목. 1~7번 출구로 나오면 철도를 무단횡단하지 않는 이상 여기로 오지 못한다. 

2025년 9월 27일 토요일

독서 기록 - 리처드 피셔의 롱 뷰

DNA 이중나선이 품고 있는 암호를 해독하면서 인류는 생명의 신비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여기고 새로운 지식을 밝혀 나가는 과정에 열광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결론은 어떠한가? 유전자가 생명 현상을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심각한 편견이며, 넌코딩 영역이라고 불리던 곳(실제로 인간 유전체에서는 압도적인 영역을 차지함)의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혈액 줄기세포를 이용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우주에서 세포는 비정상적으로 활발해져 너무 빨리 늙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평소에는 휴면 상태에 있던 영역(넌코딩 영역을 포함하는 '다크 게놈')까지 깨어나 들썩이기 시작하여 노화 가정을 더욱 가속했다고 한다.

코딩 영역과 그 주변부의 '뉴클레오티드 캐릭터 시퀀스'를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징검다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겨우 건너게 되었다고 해서 큰 개울의 전체를 파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코딩 영역은 물론이요 넌코딩 영역의 기능을 다 알게 되었다고 해서, 유전체가 모든 것을 전부 결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하다. 유전자(넌코딩, 다크 게놈 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생각해도 좋다)가 어떤 형태로 발현되어 개체의 특성을 나타내도록 만드는 과정을 크게 지배하는 것은 결국 외부 요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유전체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미리 낙담하지 말자. 이것이 오늘의 이중나선 선생님이 남기는 한 마디이다. 

롱 디엔에이? 이중나先生(이중나선생)의 오늘의 말씀.

'모든 것은 (유전자에) 다 결정되어 있다' 또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우리를 좁은 사고의 틀에 가두게 된다. 특히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든가 몇 년 뒤에 선출에 의해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구성원들(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아야 할 환경을 포함)을 희생하여 최적의 현재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든다.

리처드 피셔의 『롱 뷰』(원제: The Long View)는 이러한 단기적 사고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면서 장기적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후 변화나 환경, 지속 가능성 문제 등은 특정 당이나 대통령이 집권을 하는 몇 년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감히 가시적인 성과를 내겠다고 짧은 안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늘 우선 순위에서는 밀리거나 임기 다음으로 책임을 전가해 버리는 것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트럼프는 기후위기가 사기라고 떠들고 다니겠는가. 현재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야만 일자리가 유지되고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주기의 단기 인센티브가 주는 문제점이다.

최근 읽은 책. 『경험의 멸종』과 『소니 턴어라운드 』는 9월 21일에 독서 기록을 남겼다.

'미래 세대가 우리에게 해 준게 뭐가 있지요? 왜 우리가 그들을 생각해야 되나요?'라고 물어서는 전혀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본문 394쪽에 소개한 어느 무명씨의 말, '노인들이 그 그늘에 앉아 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무를 심을 때, 그 사회는 위대해진다'라는 말은 독자의 마음 속에 깊은 울림을 준다. 

305쪽의 그림.

이 책의 1부에서는 단기적 사고의 폐해(자본주의 및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 2부에서는 단기적 사고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시간 인식 방식, 그리고 3부에서는 장기적 관점을 키우기 위해 시간 인식을 확대하는 실질절 방법을 다루고 있다. 특히 2장에서는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나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답습하고 있는 사람 무리, 그리고 언어·문화적 배경이 다른 인류 집단에서 단기적인 시간 인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장기적 사고를 갖도록 돕는 일에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 동참하거나 전통 또는 종교적 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가지라는 뜻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서 나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평생 쌓아 온 일에 의해서 사후에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물론 나는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행동을 하도록 스스로를 돌아볼 것이다. 나는 이에 더해서 지구 및 생명의 탄생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자연사적인 관점에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지적 존재라는 오만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장기적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 보자. 

  •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는 제도를 통해 20년 주기로 새로운 신을 건설하는 일본의 전통
  • 옥스퍼드 올 소울즈 칼리지에서 100년에 한 번씩 거행된다는 청둥오리 예식(The Marching of Lord Mallard)
  • 조각가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가 직접 스물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만든 Ash Dome
  •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서 나무로 만든 바위를 시냇물에 밀어 넣은 뒤 35년 동안 기록한 <나무 바위(Wooden Boulder)>
  • 천년 동안 연주되는 음악 <Longplayer>
  • 1996년에 시작된 500년짜리 프로젝트인 Bogmir Ecker의 Tropfsteinmachine
  • 기원전 1천년에 시작되어 지금은 시민 참여 프로젝트가 된 <어핑턴의 백마>
  • 만년 뒤를 겨냥한 <롱 나우 파운데이션> 등
일본의 신궁과 같이 완성된 형태이면서 계속 재생성되는 것도 있고 아예 먼 미래에 완성되기를 기대하면서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는 초장기 프로젝트도 있다. 책에서 소개한 이러한 작품(활동?)을 인터넷에서 직접 찾아보면서 마치 미술관 또는 박물관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당장 느끼는 나의 괴로움은 장기적 목표 앞에서 수그러든다. 500년 뒤에 최종본을 만든다는 그 일을 왜 하는지, 목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지금 독서 기록을 쓰면서 돌이켜 보니 꽤 두꺼운 책을 너무 빨리 읽어 버린 것 같다. 미술관을 천천히 거닐듯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나무 바위>는 시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다. <애시 돔>처럼 이 나무 바위 이야기는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고 하더라도 미래는 좌절을 안겨줄 것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무 바위는 또다른 중요한 것을 말한다. 모두가 강을 헤치고 넓은 바다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사라짐과 망각이 결국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80-381쪽)

이는 내시가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다. 원문은 위에서 소개한 <나무 바위>의 링크를 클릭해 보기 바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던져진 화두인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PBS)의 폐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국책연 임무 vs 연구자 역할" PBS 폐지 이후 '출연연' 두고 현장 난상토론, 대덕넷 2025년 9월 25일).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서 경제 성장을 주도해야 한다는 시급함에 장기적 관점이 들어갈 틈은 별로 없다. 아주 개인적인 관점이자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만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과학기술'이라는 한 낱말이 주도적으로 쓰이면서 정책이나 정치적 함의를 담게 된 것은 매우 불편하다. 

이 토론회 기사를 보면 저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각각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PBS에 길들여진 우리 출연연 연구자들은, 경쟁을 통하여 수주해야 하는 과제와 무관하게 인건비를 보장받는 것은 '노는 것과 같다'라는 편협한 사고의 희생자가 된 것 같다. PBS 폐지의 핵심은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주겠다는 현격한 처우 개선인가? 혹은 현재의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바람직하든 아니든 일단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어느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질 것 별로 없을걸요?' 제목과 목표가 제시되고, 구체적인 방법은 일정에 쫒겨 얼기설기 만들어지며, 이를 추진하기 위한 미끼가 되는 단기성 인센티브만 나열된다. 그리고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으나 통제와 관리라는 방식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어서 온갖 억측만 난무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PBS 제도의 폐지가 이루어질 전환기를 위해 마련되고 있다고 알려진 새로운 제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의 글도 여러 주제를 널뛰기하고 있다. 글 작성의 주요 목적은 독서 기록이었고, 오늘 도서관에 이를 반납하고 나서도 별도로 구입하여 소장하여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몇 안되는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인류세'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떤 장기적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PBS 폐지라는 당장의 숙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인류세의 존속이라고 해서 현 지구의 모든 자원과 미래 세대까지 갈아 넣어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자원 투입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2025년 9월 25일 목요일

인삼을 닮은 DNA 이중나선 그림

오전 내내 연수직 채용 면접에 들어갔다가 허겁지겁 점심을 먹은 뒤 충남대학교로 약학대학(W6)으로 달려갔다. 융합연구 활성화를 위한 공동워크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앗, 쓰레기통...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 바이오 연구와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고 싶은 연구자는 양 기관에 모두 존재한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두 곳 사이에서 진정한 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우리 연구소 디지털바이오센터의 김대수 박사가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제목 슬라이드의 DNA 이중나선 그림을 보니 문득 인삼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사진을 챗GPT에 업로드한 뒤 DNA 이중나선 이미지를 인삼 모양으로 바꾸어 보라고 하였다.


슬라이드 자체를 변조하라고 시키지는 않았는데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 가짜 뉴스에 근거로 따라다니는 위조 또는 변조 사진이 이토록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삼이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서 내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중나선 모습을 유지하면서 다시 그려 보라고 하였다.



이제 내가 의도한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인삼 애호가로서 이 이미지를 종종 활용해야 되겠다. 안타깝게도 인삼을 자주 먹지는 못한다.

BioPerl의 상징 이미지는 먹과 붓으로 쓴 한자를 연상시킨다. 마치 갑골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BioPerl.

챗GPT에게 이 이미지를 갑골문자처럼 보이게 다시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점점 기괴해지는 느낌이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어쩌면 고대인도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DNA에 다리를 달아 놓다니...



오늘의 장난은 여기까지. 하나만 더 올리고 끝내겠다. 챗GPT에게 글씨를 쓰게 했더니 자꾸 틀려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2025년 9월 22일 월요일

MIDI 드럼 데이터의 빅데이터(?) 분석

분석에 사용한 데이터의 분량이 별로 많지 않아서 빅데이터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무료 MIDI 드럼 파일 제공 웹사이트에서 80개(8개 장르 x 10개)의 MIDI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어떤 타악기 종류가 쓰였는지 조사해 보았다. 표준적인 드럼세트의 각 파트가 대부분이지만, 라틴 계열의 리듬은 그렇지 않다. 분석에 쓰인 총 마디의 수는 1,184개였다. 분석 및 결과의 시각화에는 당연히 챗GPT가 쓰였다.


  • Latin (약 120 BPM) → 아고고·카우벨 같은 라틴 퍼커션이 두드러짐
  • Rock (~110 BPM) → 킥·스네어·하이햇 집중
  • Blues (~90 BPM) → 라이드 심벌 중심, 상대적으로 느림
  • Dance (~125 BPM) → 하이햇·탐버린·특수 노트 풍부

Rock 장르의 경우 총 13개 정도의 노트가 전부였는데, 장르를 확장하니 55개로 늘어났다. 타악기 연주 정보라서 노트의 길이는 별로 의미가 없다. Rock 장르 파일을 분석하였을 때 표준 GM 드럼 맵에 정의된 것은 10개였다. 왜 이런 분석을 하고 있는가? 아두이노 나노를 응용하여 만드는 Nano Ardule MIDI Controller에서 드럼 머신 기능을 추가하기 위함이다. 당초 계획은 SD카드에 저장한 짧은 MIDI 파일을 반복 재생하는 것이었으나, 구현 과정에서 잦은 에러에 직면하였기에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즉, 2마디 단위의 드럼 패턴을 MIDI 데이터가 아니라 스텝 형태로 전환하여 PROGMEM 또는 EEPROM에 저장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Rock을 기준으로 하여 드럼 소리를 결정한다면 12비트가 필요하고, 여기에 4단계 정도의 액센트 정보를 넣어야 한다. 

한 박자에 몇 스텝이면 충분한가? 최소 간격이 16분음표라고 가정하면 4/4 박자 한 마디에 16스텝(4 x 4)이 필요하다. 그런데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스윙이나 트리플렛을 감안하면 1박자를 12스텝으로 분할해야 한다. 이 경우에 악기 정보까지 포함하면 대략 192B/패턴의 메모리가 필요하다. 1KB에 다섯 패턴 정도를 저장할 수 있다. 메모리 용량이 조금 더 큰 아두이노 나노 에브리를 사용한다고 해도 PROGMEM에 20KB를 확보하기도 힘들 터인데... 어쨌든 이를 실현하려 해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장르에 따라 사용하는 타악기의 종류가 무척 다르다. 10~13개 정도의 타악기 소리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rock 정도.


드럼 패턴에 따라서는 GM kit이 아닌 다른 것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Cakewalk TTS-1에서 설정 가능한 Roland GS 계열의 드럼 킷 아홉 가지.

오랜만에 Cakewalk by BandLab을 실행하였더니 조만간 Cakewalk Sonar(유료)로 바뀐다고 한다. 이제 무료 시절은 끝났는가... 무료 서비스로는 Cakewalk Next라는 것이 있다고 하니 알아보아야 되겠다.


챗GPT를 사용하면 드럼 MID 파일을 입력하면 두 마디 단위로 쪼개어 이런 '인코딩' 체계에 맞추어 재정리해주는 파이썬 스크립트도 만들어 낼 수 있다. 심지어 드럼패턴 MIDI 파일의 제목(장르)과 실제 사용한 노트를 이용하여 가장 어울리는 드럼킷을 제안해 보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었다.

🔹 정리

  • Rock, Jazz, Blues, Folk → GS의 Rock Kit, Jazz Kit, Brush Kit 등이 더 적절.

  • Latin, World, Ethnic → GS의 Latin Kit, Ethnic Percussion Kit.

  • Dance, Contemporary → GM Standard Kit로 재생하면 “어쿠스틱 드럼” 느낌인데, 실제로는 GS Electronic Kit/TR-808 Kit 이 가장 적절.


👉 즉, 네. 지금 데이터 중에는 확실히 TR-808 / Electronic Kit이 어울리는 패턴이 있습니다.
특히 Dance/Contemporary 폴더 안에 있는 파일들이 그래요.

원하시면, 제가 Dance/Contemporary 계열 파일만 따로 추려서 → TR-808/Electronic Kit 추천 매핑을 표로 정리해 드릴까요?

2025년 9월 21일 일요일

자유활달하고 유쾌한 '이상(理想) 공장'의 건설

오늘의 제목은 소니(SONY)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의 설립 취지서(1946년)에 담긴 글을 인용한 것이다. 

"자유활달하고 유쾌한 이상(理想) 공장의 건설"

그리고 경영방침 제1항에는 쓸데없이 규모의 크기를 쫒지 않는다는 글도 들어 있다고 한다. 

퇴근 후의 자유로운 일상을 꿈꾸는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꺼내기 힘든 말이다. 직장은 거쳐 가는 곳이고, 이직을 준비하기 위함이 지금 직장을 다니는 유일한 이유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나의 재능과 열정을 쏟아부을 곳이 바로 현재 근무하는 곳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현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히라이 가즈오의 책 『소니 턴어라운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1960년생인 그는 소니의 계열사였던 CBS소니(현재의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해 소니 사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전설적인 인물이다. 오늘 글의 제목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4,550억 적자라는 최악의 상황에 사장이 되어 소니를 부활시키고 20년 만에 최고 이익을 이끌어낸 그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소니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품질의 전자제품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었다. 이는 그를 공격하는 좋은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히라이 가즈오는 음악이나 게임과 같이 소니의 주류에서는 약간 벗어난 길을 걸어 왔지만, 이렇게 '이단'의 삶을 살아온 것이 오히려 리더로서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노스탤지어와의 결별은 매우 중요하다. VAIO를 매각하면서 원로들로부터 많은 충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전자(電子)를 경시할 수 없다는 의견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과거의 명성에 안주할 수는 없다. 당시 그는 이런 면담 요구를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 다소 유연한 자세를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2013년 히라이 가즈오가 요시다 켄이치로를 소니의 매니지먼트 팀으로 불러 들였을 때, 그를 파트너로 확신하게 만든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 (요시다) "저는 예스맨은 되지 못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 (히라이) "당연합니다. 바로 그게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겁니다."

요시다 켄이치로는 2018년 소니의 회장 겸 CEO가 되었다. 그는 장기적 관점의 경영과 목적 중심의 리더십을 강조했다고 한다. 히라이 가즈오가 소니의 사장을 맡는 6년 동안 전 세계 거점을 돌며 가진 타운올 미팅에서 KANDO('감동'), 즉 소니는 고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모두 함께 만들어 내자고 역설하였다. 이 정신은 요시다 켄이치로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즉, '창의성과 기술의 힘으로 세상을 감동으로 채운다'는 일명 'KANDO'은 소니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우리는 가장 큰 회사가 아니라 아티스트와 작곡가에게 가장 친화적인 음악 회사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실시간으로 플랫폼에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얻고 있는지 알려주는 디지털 플랫폼을 아티스트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출처: 차우진의 엔터문화연구소)

요즘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판권을 소니 픽처스가 넷플릭스에 팔아넘긴 것에 대해 안목이 부족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글을 종종 보게 되는데, 모든 사업이 다 대박을 터뜨릴 수는 없으며 소니 픽처스 역시 이런 결정을 내린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소니가 창작자에게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엔지니어도 아니고 퇴직 후 취미생활을 발전시켜 뭔가 수익사업을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아니다. 집에서 뭔가 만들려고 뚝딱거리는 모습을 제조업에 비유한다면, 나 자신이 공급자이자 유일한 고객이 되는 셈이다. 다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물론 ChatGPT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지만—시간과 노력을 적게 들이는 최적의 방법을 찾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는 도중에도 진정한 배움이 있었으면 한다.

Nano Ardule MIDI Controller 개발은 과연 유쾌한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을까? 일요일이었던 오늘만 해도 ChatGPT를 통해 총 13번의 기능 요청 및 컴파일을 하였다. 이제 설정을 EEPROM에 써서 저장하거나 복원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일이 남았다. 오늘까지 개발한 스케치는 단계별 코딩 로드맵 단계6의 v20250921로 공개해 놓았다.

처음에는 SD카드에 format 0 MIDI file을 저장하여 재생 또는 드럼 루퍼로 작동하는 기능까지 추가하려고 야심찬 계획을 세웠었으나 근본적으로 메모리 부족 문제에 부딪쳤고, 설상가상으로 SD카드에서 MIDI file을 안정적으로 읽어들이는 것이 썩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냥 순차적으로 파일을 읽어서 재생하는 것은 그런대로 되는데, 별도의 인덱스 파일을 경유하여 접근하려고 하니 자꾸 에러가 발생한다. 원래 이것도 메모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시도한 편법이었는데 말이다.

작동 동영상을 빨리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드럼 루퍼의 경우 MIDI 파일을 쓰지 않고 48 스텝(2 마디 단위) 그리드 형태의 데이터를 만들어서 코드 내에 저장하거나 EEPROM에 저장한 뒤 불러서 재생하는 형태로 바꾸어 보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MIDI 파일에 비해 데이터의 크기가 획기적으로 줄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