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8일 목요일

독서 기록 - 공부의 철학(지바 마사야)

2018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는 여수에 출장을 왔다. 둘째 날의 모든 학술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서 밀린 독후감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열었다. 참고로 나는 2 주 간격으로 지역 도서관에서 책을 5~6 권 정도 빌린다. 정해진 기한 안에 전부 읽으려고 노력을 하지만 간혹 재미가 너무 없어서 끝까지 읽지 못하는 책도 있고, 간혹 시간이 부족하여 대출기간을 일주일 늘이기도 한다.

오늘 독후감을 적으려는 책은 젊은 일본인 철학자(1978년생)인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이다. 부제는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이다. 옮긴이는 박제이.


마치 90년대 아이돌을 연상시키듯 염색한 긴 머리를 한 그는 그러나 어엿한 대학 준교수(associate professor)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깊은 공부(radical learning)란, 세상과의 동조에 서툴러지는 것을 의미한다. 도입부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타자'를 소개하고, 유한과 무한의 대립, 언어의 불투명성에 대하여 논한다. 언어의 불투명성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언어를 조작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모든 공부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래디칼 러닝이란 곧 언어 편중적 인간이 되어 언어유희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러니와 유머, 그리고 난센스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환경에 순응하는 코드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이러니, 코드에서 어긋나려고 하는 것이 유머이다. '이래야 한다(당위)'를 '이러한 코드다'라고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을 '메타적 입장에 머문다'고 한다. 아이러니와 유머가 과잉 상태가 되면 극한 형태인 난센스가 된다.

아이러니는 원래 그리스어 eironeia에서 온 것이다. 이 말에 철학적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소크라테스이다. 이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아이러니(링크)>를 읽어보자.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자신의 현 상황을 메타적으로 관찰하여 자기 아이러니와 자기 유머의 발상으로 현 상황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고찰한다. 단 무비판적으로 무엇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결단주의는 피해야 한다. 아이러니의 비판성을 살려두면서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이번에 같이 읽은 책 <당신의 행복이 어떻게 세상을 구한다고 물으신다면(원제 How to be alive - a guide to the kind of happiness that helps the world; 콜린 배럿 지음)>에서 정형화된 삶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어떤 종류의 책을 골라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실전적인 면을 설명하였다. 되도록 여러 종류의 입문서를 비교하고, 교과서나 기본서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한다. 전체를 다 읽으려고 애쓰지 말고, '골라 읽기'도 독서의 한 방법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공부의 타임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에버노트와 같은 앱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책 제목만 보아서는 역시 일본인 작가인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쓴 <지성만이 무기다>(독서 기록)와 같은 독서 및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현대 (프랑스) 철학 입문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의 <철학 읽는 힘>(독서 기록)도 다시 기억해 두자.

지바 마사야의 저작으로 이보다 앞서 2017년 국내에 소개된 <너무 움직이지 마라>도 읽어보도록 하자.

2018년 6월 24일 일요일

수치화와 평가가 전부는 아니다

풍족한 간식, 그리고 평가서.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교육장의 모습이다. 교육도 일종의 서비스이므로 피교육자, 즉 고객에게 더 나은 인상을 줄 수 있는 노력을 제공자가 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당연히 평가서에는 좋은 점수를 쓸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금요일 직장에서 열렸던 연구역량강화 교육에 참여했었다. 요즘은 이런 교육을 제공하는 전문 기관이 생겨서 온라인 강의를 듣거나 집합 교육에 참석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현장에 와서 실시하는 집합 교육에 참여하기도 한다. 교육장에 들어가니 냉장식품이 든 스티로폼 상자가 여럿 보였다. 보통 물이나 커피, 쥬스와 과자 정도가 있는 정도인데 웬 냉장식품? 진행자가 상자를 열고 꺼내는 것은 일회용 용기에 담긴 생과일 쥬스와 아주 조그맣게 자른 티라미수 케익 등이었다. 오~ 이런! 이렇게 준비가 철저하다니! 나에게 감동이 밀려왔을까? 그건 아니었다. 물론 맛있게 먹기는 하였다. 하지만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회용 포장재는 다 어떻게 하고?

이렇게 길들여진 나 자신에게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회의장이나 교육장에 가면 간식거리로 무엇을 주는지 기대를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때문이다. 과도한 칼로리가 건강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물론이요, 간식을 담는 일회용 포장재의 환경 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모바일 간식(혹은 음료)'에 대한 생각은 다음에 정리하여 글로 남기고자 한다.

그 다음은 평가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계량하지 못하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피터 드러커의 유명한 말이다. 강의 평가서를 받는다는 것은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지표로 삼기 위함이다. 매우 좋은 목적이다. 그러나 계량(평가)를 하려면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올 봄에 며칠 동안 열리는 집합 교육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마지막 날 수료식을 마치고 강의 평가서를 작성해야 했다. 평가서 양식에는 약 10 사람의 강사 이름이 적혀있고 이에 대한 만족도를 여러 항목에 대해서 수치화하여 적어야 했는데, 강사 이름만으로 그 강의가 어떤 것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내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대충 평가서를 적어야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아예 평가서를 펼쳐놓고 강의를 듣기 시작하였다. 강의를 들으면서 즉시 평가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오히려 강의에 집중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의(교육)란 지식을 전달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평가서를 펼쳐놓고 강의를 들으니 마치 내가 강사의 강의 능력을 평가하는 면접장에 앉은 면접관이 된 느낌이었다. 교재는 잘 짜여졌나? 전달력과 강의 태도는 우수한가? 이런데 집중을 하면서 오히려 강사가 전달하는 내용은 한 귀로 흘려듣게 되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독자에서 문학 평론가의 입장인 척 하려니 오히려 책이 주는 정보와 감동에 집중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 평가서에 체크를 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일년에 한 번 정도 학회 참석을 위해 국외 출장을 간다. 정부 연구비의 지원으로 다녀오는 것이니 출장 보고서를 남겨야 한다. 대충 작성하는 사람도 있고, 동행인 표시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작성한 보고서에 이름만 얹으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좀 더 꼼꼼한 편인 나는 충실한 보고서를 만들고자 강연 내용을 열심히 메모를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일이 너무 과도해서 정작 영화나 책을 보듯이 편안히 음미를 하지 못한다. 이 일은 '평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기록 행위 자체는 강의 평가서를 만드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전부 수치화하여 순위를 매길 수도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정서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가전제품 수리를 위해 서비스 센터를 다녀온 뒤 전화로 서비스 만족도에 대한 조사를 하고, 연말이 되면 공공기관의 인프라 부서는 고객만족도 평가를 한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정책을 펼치기 전에 여러 가지 형태의 설문 조사를 하는 일도 잦다. 대부분 설문지의 문항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있기 일쑤이고, 그 결과를 해석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의 의도가 작용한다. 모 일간지에서 정례화한 대학순위평가라는 것도, 그 일간지의 인지도·사회적 영향력·발간 부수와 구독률(종이 신문을 별로 보지 않는 요즘은 의미가 없는 지수이지만)·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광고 수주를 높이기 위한 철저한 기획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이 평가에서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한 대학의 노력은 좀 더 좋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학교 본연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계량화와 평가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다 이렇게 처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에는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자정(子正)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늦은 시간, 차를 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떤 식당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 식당에는 LED 광고판이 붙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영업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영업시간: 오전 12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아마도 영업주는 낮 12시에 문을 열어서 밤 11시에 닫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 12시는 24시 시간 체계에서 0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광판에 표시된 문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 가게는 밤 12시(자정)에 문을 열어서 하루 종일 영업을 하다가 23 시간째인 밤 11시에 닫습니다'는 말이 된다.

하루를 12시간 단위인 오전과 오후로 나눌 때, 나머지 시각은 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지만, 그 단위의 경계가 되는 12시는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문제가 된다.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에서 한 주의 시작이 무슨 요일인가를 다루면서 이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링크). 이에 의하면 하루에 두 번 있는 12시는 오전이나 오후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낮 12시, 밤 12시'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오전과 오후의 경계가 아니라 하루의 경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오늘 밤 12시'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오후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난 시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이 시각은 내일(의 시작) 아닌가? '자정'이라는 표현도 '날'과 결합하면 종종 혼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 과제의 온라인 제출 마감은 6월 20일 자정까지입니다.
그러면 6월 20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6월 20일 24시(=21일 0시)가 마감이라는 뜻인가? 상식적으로는 6월 20일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난 밤 12시를 의미할 것이지만, 6월 20일 0시가 아니냐는 반론도 나올법 하다. 대법원 판례에서는 24시, 즉 하루가 끝나는 시점을 자정으로 해석한 것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혼동을 막기 위해 뉴스 등에서는 자정(=오전 12시), 오후 12시(낮 12시)이라는 표현 대신 철저히 24시 체계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자정이라는 낱말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정이라는 낱말이 만들어지고 쓰이던 시절에는 하루가 바뀌는 경계과 자정은 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대단한 결심을 했어. 오늘 자정을 기하여 실행에 옮긴다!
자정을 0시로 정의한다면 이 말은 넌센스가 된다. 이미 0시는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 자정은 하루가 끝나는 밤 12시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딴지를 걸자면 오늘 밤 12시는 이미 내일의 시작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의 한국 대 멕시코의 경기가 6월 24일 0시에 열렸다. 이를 예고하는 뉴스를 직접 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제(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비록 자연스런 표현이기는 해도 말이다.
오늘 밤 12시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우리의 언어 현실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표현이다. 하지만 6월 23일 앵커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내일(24일) 새벽 0시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립니다.
이 글은 24일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작성하고 있다. 이미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는 다 끝난 과거의 사건이 되었는데, 뉴스 앵커는 이 시점에 '오늘 자정에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렸었죠'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오늘 새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자동차 보험을 새로 들었을 때 효력이 발생하는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오늘(6월 24일) 계약을 체결했다면 밤 12시부터이다. 계약서에는 6월 24일 24시로 표현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결국은 같은 시간이지만 6월 25일 0시부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휴대폰 시계에서 자정에 날짜가 바뀌는 것을 보라. PM 1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나면 정확히 다음날 AM 12:00 (혹은 00:00)으로 표시되지 않는가? 시계의 표현 방식을 12시에서 24시 체계로 바꾼다 한들 24:00이 표시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현실 생활에서는 한밤중이라는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지만, 하루의 경계를 이 사이에 심어서 둘로 나누는 것이 불가피하니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어쨌든 자료 조사와 내가 가진 상식을 종합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쓸 것을 제안한다.

  • 12시에는 '오전' '오후'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고 대신 '낮 12시', '밤 12시'라고 한다.
  • '자정'에는 가급적 '날'과 관련된 표현을 붙이지 않는다. 대신 몇일 0시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 오늘 밤 12시는 사실은 내일이다 :)


2018년 6월 20일 수요일

로드 엔드 베어링(rod end bearing)은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인터넷이나 뒤적거리는 일반인의 지식 수준이 오죽하겠는가. 진공관 앰프용 트랜스포머 권선기를 만들면서 회전축을 지지하기 위한 적당한 물건을 찾다가 지난 5월 하순에 로드 엔드 베어링을 알리익스프레스에 주문하여 오늘 받았다. 고정된 축이 자유롭게 회전하는 그런 베어링을 꿈꾸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응? 뭐가 이렇게 뻑뻑하지? 내가 상상하는 용도가 아니었나? 다시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이 베어링은 축의 회전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일정 각도 이내에서 축이 자유롭게 꺾일 수 있게 하면서 축을 단단히 지지하는 물건이었다. 유튜브에서 캡쳐한 다음 사진을 보자(원본 링크). 이것은 비행기의 보조익을 움직이는 봉 끝에 쓰인 사례이다.


그냥 흔한 몇백 원 짜리 미니어쳐 베어링이나 살 것을... 

그림 출처: 베어링샵. 제품명은 미니어쳐베어링 일반형 내경 6~9mm이다.


2.14 달러 낭비했다. 이렇게 배워가는 것 아니겠는가. 

2018년 6월 17일 일요일

독서 기록 - <예술가로 살만합니다> 외 다섯 권


예술가로 살만합니다

  • "우리 동네 예술가들과 작업 이야기"
  • 이상진 글·그림
예술을 생업으로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장래의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딸아이를 보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는 학교에 들어간다 해도 졸업 후에 원하는 일을 하면서 과연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지은이 이상진은 드로잉 작가와 그림선생님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살고 일하는 연남동 주변의 여러 아티스트들을 만나 그들의 솔직한 모습을 그림과 글로 담았다. 수제화 공방, 1인 미용실, 음악 스튜디오, 도자기 공방 등 그 범위도 매우 다양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꿈을 꾸는 자에게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체로) 길이 열린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괄호 안의 글에 담긴 의미가 무겁지만 말이다. 특정 지역이 이슈화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샵을 내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지만,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서 처음에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 점점 올라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결국은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이곳을 차지하면서 해당 지역의 모습이 점차 삭막해져가는 일이 되도록 벌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링크는 바로 다음의 책 <무용지물 경제학>의 주장과 연관지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임대료가 아니라 권리금이다

무용지물 경제학

  • "정통경제학의 신화를 깨뜨리는 발칙한 안내서"
  • 베르나르 마리스 지음 | 조홍식 옮김
수요와 공급의 법칙, '보이지 않는 손', 경쟁과 효율의 추구, 모든 경제 주체들이 이기적인 동기로 움직인다는 것, 심리학과 경제학이 뒤범벅이 된 요즘의 이론... 현대 경제학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현실을 이해하자는 취지를 한참 벗어나서 이제는 '이러해야 한다'는 이유로 세계를 움직이려 한다. 법칙을 더욱 손질하고 난해하게 만듦으로써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저자의 결론은 이러하다.
  1.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바보다.
  2. 완전경쟁에 가까울수록 세계는 더욱 비효율적으로 변한다.
  3. 교환가지가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라 비화폐적이고 호혜적인 행동이 발전을 이끈다.
342쪽부터 나오는 로빈스 크루쏘우와 프라이데이의 국민생산 모델(toy model)은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기회가 된다면 브뤼노 방뜰루(Bruno Vebtrlou)가 제시했던 원본 글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유엔을 말하다

  • 장 지글러(유엔 인권이사회 자문위원) 지음 | 이현웅 옮김
이번에 읽은 여섯 권이 책 중에 불편한 현실을 가장 잘 일깨워준 책이다. 장 지글러는 학자이자 활동가로서 <왜 세계의 절만은 굶주리는가>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유엔 이전 존재했던 국제연맹이 무력하게 사라졌듯이 유엔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쟁과 기아, 빈곤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적 조직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물론 현재의 유엔이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엔이 형성된 과정, 운영 방식, 미국의 영향력과 공작, 상임이사국이 행사하는 거부권의 문제점 등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하였다.

특히 5장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관심있게 읽었다. 
다자 외교에 견주어볼 때, 키신저는 제국주의적 이론과 전략을 육화하고 있는 인물이다... 제국주의 이론의 바탕에는 이러한 가정이 있다. 제국의 정신적인 힘,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 법적 의지, 사회 조직은 안정을 보장한다. 제국만이 국가, 국민, 대륙 사이의 평화를 지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히 말한다면 미국이 신으로부터 민주주의와 문명을 전파할 임무를 부여받았을 거라는 이런 메싱적 이데올로기는 아직까지도 낡은 것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키신저는 이 책에서 왜 미국이 핵폭탄을 자유롭게, 그리고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정당한 권한을 가진 세계 유일의 국가인지 설명한다... 국제법, 인권, 국제인도법의 기준에 따르면 헨리 키신저는 전범이다. 나아가 그의 세대에서도 가장 악한 전범 중 한 사람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키신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들의 주동자였고, 당시에 그 대륙에서 성립된 폭력적인 독재 체제들의 가장 충실하고 능력 있는 보호자였다. 
156쪽부터는 반기문 사무총장이 선출된 과정과 그 배경을 다루고 있다.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

  • "권태호 묻고 유종일 답하다"
  •  유종일(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이사장)과 권태호(한겨레 논설위원)의 대담집
촛불시민혁명에 의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급기야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철학과 정당성·도덕성이 없는 정권이 한 국가의 역사를 얼마나 잘못된 길로 후퇴시켰고, 이를 청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이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압축 성장만의 신화를 좇던 과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약에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1. 투자라는 이름의 마약 - 자본과잉 시대의 투자 방향 전환
  2. 환율 마약 - 수출주도 아닌 소득주도 성장
  3. '빨리빨리 마약'과 혁신성장 - 여유가 있어야 '유레카'가 나온다
  4. '찍기'라는 마약 - '선택과 집중'을 넘어 '백화제방, 백가쟁명'으로
새 정권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하여 비정규직 철폐·최저임금인상 등을 주요 정책으로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고용지표와 같은 현실적인 경제 수치는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이에 대하여 자유주의적 경제론자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고, 경제 지표를 측정하여 이를 평가하는 데에는 현 대통령의 임기 내에는 어려울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약자를 배려하며 경제적 체질 개선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위험한 요리사 메리

  • "마녀라 불린 요리사 '장티푸스 메리' 이야기
  •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 곽명단 옮김
아일랜드 이민자였던 메리 맬런(Mary Mallon, 1869~1938)은 강건한 신체에 자존심이 높고 지적 욕구도 높은 가정 요리사였다. 그런데 그녀가 일했던 집에서 연쇄적으로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하였다. 세균이 감염병이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보건 위생에 대해서 제도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던 시기였지만 아직 항생물질은 발견되기 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메리는 아주 건강한 상태에서 장티푸스 균을 퍼뜨리는 보균자였던 것이다. 그녀가 유일한 건강 보균자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 추적 끝에 붙잡혀서 격리시설에 수용되어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황색 저널리즘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실명이 공개된 채로 자극적인 그림(요리하면서 내쉬는 숨에 해골이 그려짐)과 함께 장티푸스를 퍼뜨리는 마녀처럼 취급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 것이다. 고용된 가사 노동자로서의 평범한 삶이 완전히 파괴된 책임은 누구에게 있었을까? 그녀가 보건 당국에 조금만 더 협조적이었다면 조금 더 나은 처우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리는 자기 삶은 직접 제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남의 개입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공적이 권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녀가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요리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보균자로서 아무리 개인 위생에 조심을 한다 하여도 요리사라는 직업을 이어 나갈 수는 없다. 당시 사회는 이러한 개인에게 다른 직업을 갖도록 재교육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심지어 강제 수용 중인 그녀에게 장티푸스 균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생제가 없던 시절 수술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 효과도 확신할 수 없었으며, 메리 자신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저자가 지은 <검은 감자(아일랜드 대기근 이야기)>도 읽고 싶어졌다.

별난 세상을 움직이는 경제 코드

  •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배우는 경제학"
  • 청스 지음 | 임보미 옮김

2018년 6월 16일 토요일

6월의 일상


자전거 타이어용 펌프로도 자동차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다. 공기압은 로드 자전거용 타이어에 비하면 훨씬 낮지만 워낙 많은 양의 공기를 넣어야 하기에 2-3 주에 한 번씩 이렇게 바람을 넣다 보면 등허리가 뻐근하다. 타이어는 아직 교체 주기가 되지는 않았으나 천천히 공기가 빠지는 증세를 앓고 있다. 카센터에서 비눗물을 칠해가며 점검을 몇 차례 하였지만 공기가 새는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니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공기를 채울 수밖에... 매번 차에 오르기 전에 타이어의 상태를 확인하는 버릇이 든 것은 좋은 일이다.


알라딘에서 구입한 에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 1935~)의 음반. '형제들(Fratres)'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구입한 패르트의 음반이다. 이번에 구입한 음반에 수록된 곡은 Tabula Rasa, Collage über Bach, 그리고 Symphony No. 3이다. Tabula Rasa는 '깨끗한 석판(위키)'을 의미한다.  깨끗한 석판 또는 빈 서판은 철학 이론으로도 매우 잘 알려진 용어이다.

패르트의 음악은 간결하고 느리며 서정적이다. 명상을 위한 음악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패르트의 음악에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그의 신앙적 바탕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현대음악이라고 하면 마치 복잡한 수학 공식처럼 난해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박테리아 유전체에서 재조합(recombination)의 흔적을 찾기

내가 생각하는 진화라는 것은 결국 유전체 서열의 변화가 표현형으로 나타나고, 환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개체의 빈도가 집단 내에서 늘어나는 현상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적합도(fitness)가 낮아진 개체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흔히들 박테리아의 진화라고 하면 단일 염기서열 수준에서 일어나는 염기치환변이 또는 indel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상동유전자 서열을 여러 종에서 모은 다음 다중서열정렬을 해 보면 기준 종에서 먼 것일수록 염기서열의 차이가 더 크게 나타난다. 이러한 염기(서열)의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DNA polymerase의 실수, radiation으로 손상된 염기의 불완전한 수복, DNA의 double-strand break가 일어난 뒤 일어나는 error-prone repair 등 다양한 메커니즘이 있지만 교과서를 쓰고자 함이 아니니 깊게 들어가지는 않겠다.

실제로는 이보다 과격한(?) 유전체 변이가 더욱 빈번하게 벌어진다. Insertion sequence의 삽입이라든가 prophage의 침입 등이 그러하다. Horizontal gene transfer도 많은 연구자들의 흥미를 끄는 주제이다.

그런데 (homologous) recombination에 의해서 외부의 유전자(일부, 전부 혹은 클러스터)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하게 된다. Recombination, 즉 재조합이란 기원이 다른 DNA 조각이 서로 교차하여 새로운 혼성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ds DNA 가닥이 끊어져서 서로 근본이 다른 것끼리 연결되는 것이다. 재조합이 일어나는 정도는 미생물 종마다 매우 다르다. 결핵균처럼 매우 제한된 환경에서 '조용히' 서식하는 것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적지만, 자연적인 transformation이 가능한 세균으로서 자유롭게 바글거리며 사는 세균은 그 빈도가 매우 높다.

Recombination은 계통발생학 분석을 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수십 종의 미생물 유전체 서열로부터 multiple sequence alignment를 공들여 얻은 뒤 phylogenetic tree를 그리는 것이 요즘 genomics를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일인데, 유전체 상의 특정 block이 재조합에 의해서 '훌러덩' 유입된 것이라면 족보를 그리는 일이 아주 까다로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조합의 검출하는 일 역시 매우 어렵다.

Homologous recombination을 검출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은 Xavier Didelot의 ClonalFrame이 그 시초가 아닐까 한다(Inference of bacterial microevolution using multilocus sequence data. Genetics 2008, PMC 링크). 이것은 원래 mltilocus sequence 데이터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녹색은 mutation, 빨강색은 recombination. 
이후 수백 개의 genome sequence를 다룰 수 있는 도구가 등장하면서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졌고, 요즘 유행인 베이지언 기법을 이용한 것도 등장하게 되었다. 임상에서 분리한 Streptococcus pneumoniae의 대규모 유전체 분석을 통하여 recombination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남을 밝힌 선구적인 논문이 이미 2011년에 Science에 게재된 바 있다.

Rapid pneumococcal evolution in response to clinical interventions. Science 2011 331:430 PubMed 링크

치료 중인 환자에게서 분리된 감염균은 살아남기 위하여 온갖 전략을 구사한다. 그 중의 하나는 항원으로 작용하는 capsule의 스위칭을 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recombination이 크게 기여한다는 것이다. 물론 recombination을 검출하고 멋지게 그림을 그려주는 도구는 이 논문 이후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안다. 당시에는 SNP의 density를 이용하여 recombination이 일어난 곳을 추정하였었지만 지금은 훨씬 세련된 통계학적 추론을 이용하는 도구도 있다. 아래 그림의 오른편에 보인 heatmap에서 빨강 블록으로 표시된 것이 바로 재조합이 일어난 곳이다.

출처: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648787/figure/F1/
요즘 내가 테스트하는 것은 Sanger Institute에서 개발한 Gubbins이다(링크). 2014년 Nucleic Acids Research에 'Rapid phylogenetic analysis of large samples of recombinant bacterial whole genome sequencing using Gubbins(링크)'라는 논문으로 발표가 되기도 하였었다.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데이터셋은 바로 위에서 소개한 Science 2011년도 논문의 것을 사용하였다(PMEN1 dataset 링크).

Gubbins를 실행하려면 FASTA 형식의 whole genome alignment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처럼 쉽게 뚝딱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먼저 고려할 것은 raw sequencing read에서 시작할 것인가, 혹은 assembled sequence에서 시작할 것인가이다. 처음에는 Roary(assembly 필요)가 만들어내는 core gene alignment를 활용할 생각을 했었으나, 이것은 유전자들을 concatenation한 것이다. 따라서 gubbins 분석이 끝난 뒤 재조합이 일어난 부위의 유전자를 찾으려면 별도의 파일(core_alignment_header.embl)을 참조해야 한다. 이것은 상당히 성가신 일이다. Reference의 좌표에 맞추어서 각 alignment를 배열하고 그 사이에 gap('---')을 넣은 파일이 필요한데 말이다.

Harvest suite의 parsnp를 사용하면 유전체 서열에서 유래한 alignment가 나오지만 이것 역시 concatenated sequence이다. Gubbins가 딱 필요로하는 형태의 FASTA alignment 파일을 만들 방법이 없는지 구글링을 반복하다가 Snippy라는 도구를 찾았다. 이것은 raw sequencing read뿐만 아니라 contig도 사용할 수 있으며, .aln(core SNP alignment)과 .full.aln(whole genome SNP alignment including invariant sites)를 생성해 주므로 후자를 gubbins에 투입하면 된다. 하지만 막상 설치를 하니 에러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첫번째 에러에 대해서는 개발자 사이트에 이미 보고가 되어 있었고(error with gbk #154) 임시방편으로 버전을 낮추어 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했더니 vcflib의 위치와 관련한 에러가 또 발생하여 freebayes-parallel 스크립트의 40번째 줄을 고치는 수고까지 해서 겨우 성공적으로 실행을 하였다. Snippy 설치 이력에 대한 정보는 별도의 글로 상세하게 작성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