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체 분야에서는 billion(십억, 109, SI 접두어로는 giga)과 peta('천조', 1015)가 낯설지 않은 단위다. 인간 유전체 한 세트가 약 3 빌리언 염기쌍이고, 대규모 유전체 데이터 저장소와 국가 단위 데이터 생산량은 이제 페타바이트(PB) 규모로 이야기된다. 유전체학은 생명과학 가운데 거대한 수의 단위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정확히 따지자면 기가와 페타는 무려 1백만 배의 차이가 난다. 중간에 '테라'(1조, 10¹²)가 놓인다.
다음의 사진은 내가 (주)제노텍에 근무하던 시절 촬영한 DNA 시퀀싱 룸의 모습이다. 아마 2002년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제노텍은 국내에서 모든 연구소와 기업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대용량 시퀀싱 장비 (ABI Prism 3700 Genetic Analyzer 다섯 대)를 보유한 곳이기도 했다. 경쟁 제품으로는 MegaBACE와 RISA-384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일루미나 장비에서 보이는 flow cell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96-well plate 단위로 모든 처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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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I Prism 3700. 기계장치가 많아서 종종 말썽을 일으키고는 했다. |
일루미나의 NovaSeq X 시리즈에 들어가는 25B flow cell에서는 single-end read로 환산하여 약 26-35 '빌리언' 리드(read)를 생산한다. 2 × 150 bp로 맞추었을 때 생산되는 분량은 약 8-10.5 Tb(테라베이스)이다. ChatGPT에게 물어보니 30× human genome whole genome sequencing(WGS)의 경우 플로우 셀 하나에서 약 64명 분량을 처리할 수 있다. 다음 사진은 마크로젠 송도글로벌지놈센터를 방문했을 때 얻어 온 25B 플로우 셀이다. 물론 시퀀싱이 다 끝난 뒤 폐기를 기다리던 것이다. 이거 하나의 가격이 얼마라고 했더라? 시약을 포함한 한 세트의 가격은 list price로서 16,000달러라고 한다.
이처럼 현대적인 DNA 시퀀싱 장비는 실험실이 아니라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에 어울릴 모습을 하고 있다. 다음 사진에는 약 25년 전, 그러니까 거의 한 세대 전에 '대규모 시퀀싱 센터'에서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 담겨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사진은 DNA 시퀀싱 장비에 들어갈 template DNA를 뽑는 단계만을 소개하였다. PCR 머신에서 'BigDye'를 이용한 시퀀싱 반응을 하고, 반응물을 정제하는 등 몇 번의 단계를 더 거쳐야 비로소 ABI 3700에 로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Capillary를 잘못 관리하여 마르게 하면? 누군가에게 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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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직장 동료였던 차선호 박사님의 젊을 때 모습. |
Ultima Genomics라는 회사에서는 산업계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원형 실리콘 웨이퍼를 sequencing surface로 이용한다. 다음은 Ultima Genomics의 장비에서 실제로 쓰이는 6인치 웨이퍼의 실물과 일루미나 25B 플로우 셀을 같이 놓고 촬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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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퍼 표면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천장에 설치한 에어컨이 그대로 보인다. |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퀀싱 장비 내에서는 움직이는 부품이 줄어들고 따라서 유지보수도 쉬워졌을 것이다. 마치 레이저 프린터의 토너를 교체하듯이 쉽게 수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즉, 대규모 시퀀싱 장비가 등장하면서 고가의 유지보수 계약이 유전체 정보 생산비의 일상적인 일이 된 것이다.
25년 전에는 96개의 capillary를 동시에 돌리는 ABI 3700 다섯 대를 놓고도 '대규모 시퀀싱 센터'라고 불렀다. 이제는 손바닥만 한 플로우 셀 하나에서 수십 빌리언 개의 read와 수조 개의 염기가 쏟아진다. 한때 megabase가 큰 숫자였고 gigabase가 놀라운 숫자였지만, 이제 우리는 billion을 일상적으로 말하고 국가 단위의 데이터는 petabyte로 센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유전체학에서 커진 것은 데이터의 양만이 아니라, 우리가 '크다'고 느끼는 숫자의 기준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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